영면 김형영 시선집 "아이쿠머니나, 평생이 이 순간이구나"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입력 2021. 2. 26. 07:31 수정 2021. 2. 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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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을 파먹었는데/ 아직도 허기가 진다"(시를 쓴다는 것부문)는 원로 시인 김형영은 숙환으로 저 세상으로 떠난 지난 15일, 평생 동안 쓴 시들 가운데 뽑아 묶어낸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투병 중 마지막까지 가다듬던 그의 시들은 아케론강을 외롭게 건너던 그에게 기꺼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과거에도 뜻대로 흐르지 않았던 세상은 고요해지고 작고 소박해지려는 그를 자꾸 흔들고 시달리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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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길을 갈 때는 춤을 춰야지./ 춤추는 건 죽어도 못 하겠으면/ 춤추듯 사뿐사뿐 걸어가야지.//…저승길을 갈 때 괴롭지 않게/ 저승길을 갈 때 무섭지 않게/ 사는 동안 춤추는 건 익혀둬야지.”(「저승길을 갈 때는」 부문)

“50년을 파먹었는데/ 아직도 허기가 진다”(「시를 쓴다는 것」부문)는 원로 시인 김형영은 숙환으로 저 세상으로 떠난 지난 15일, 평생 동안 쓴 시들 가운데 뽑아 묶어낸 시선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투병 중 마지막까지 가다듬던 그의 시들은 아케론강을 외롭게 건너던 그에게 기꺼운 존재였을 것이다. 시가 동행한 마지막을 그는 혹시 간절히 염원하지 않았을까.

“헛것에 홀려/ 떠돌다/ 떠돌다 넘어져/ 돌아보니/ 아이쿠머니나,/ 천지 사방이 여기였구나// 평생이 이 순간이구나”(「화살시편 10-돌아보니」 전문)

시선집에는 자신의 시집 10권에서 가려 뽑아 가다듬은 시 213편과 오랜 지기인 평론가 김병익의 해설과 연보가 소담스럽게 담겨 있다. 특히 자신의 인생을 ‘관능적이고 온몸으로 저항하던 초기’(1966-1979), ‘투병 중에 가톨릭에 입교해 교회의 가르침에 열심인 시기’(1980-1992), ‘종교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시기’(1993-2004), ‘자연과 교감하며 나를 찾아 나선 시기’(2005-2019) 네 개로 구분해 각 시기의 대표작들을 담았다.

많은 이들처럼, 시인의 이십대 역시 세계와 불화하고 현실에 저항한 시기였다. 시에도 스스로의 존재에 번민하며 절망적으로 항의한 그의 의식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 모기의 본능적이지만, 그럼에도 강한 저항을 보라.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모기」 부문)

어느 날 덜컥 찾아온, 이름도 희한하고 어려운 ‘조혈모세포 성장 기능 저하증’을 앓게 되면서 그에게 죽음의 이미지가 짙게 드리운다. 1979년 가족과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고 영성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이 누군지 알 것만 같다.”(「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전문)

가톨릭 교리를 접한 뒤 자유를 찾아 나선 시인이 노년에 접어들어 눈을 돌린 곳은 자연이었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나’를 찾고야 만다. 2005년 이후 시들에는 존재와 일상의 작고 소박한 ‘사태’에 곰삭아지는 그의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남 칭찬하고/ 술 한잔 마시고,/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니/ 행복하구나./ 갈 길 몰라도/ 행복하구나.”(「조금 취해서」 전문)

그럼에도, 과거에도 뜻대로 흐르지 않았던 세상은 고요해지고 작고 소박해지려는 그를 자꾸 흔들고 시달리게 했을 것이다. 세상이, 삶이 본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태어난 것 자체가 고해의 시작이었으니.

“바람 불어 흔들리는 나무에게/ 그만 흔들어라 목에 핏대를 세운다고/ 나무가 꼿꼿이 서 있겠느냐/ 목청이 나무가 되겠느냐// 세파에 시달리며 한번 살아보아라/ 사는 게 어디 뜻대로 되는 줄 아느냐?”(「화살시편 32-세파」 전문)
시인은 죽기 전 쓴 ‘시인의 말’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라며 행복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김병익 평론가는 해설에서 “시든, 종교든 혹은 사랑이든 속살거림이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태를 우리는 일상으로 겪어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정황을 김형영은 가능한 한 가장 적은 언어로 형상하고 있다”며 “그는 끝내 시인이었다”고 추억했다.

1944년 부안에서 태어난 시인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가 김동리로부터 소설을, 서정주, 박목월, 김수영 등으로부터 시를 사사했다. 1966년 『문학춘추』 신인상과 1967년 문공부 신인예술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30여 년간 월간 『샘터』에서 일했다. 1973년 『침묵의 무늬』를 시작으로 시집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홀로 울게 하소서』, 『화살시편』 등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육사시문학상, 구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시선집이 출간된 날, 영면한 시인에게 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좋았던 ‘시’는 정녕 세이레쯤의 아기 옹알이 같은 것이고 음악이었을까. 저 하늘에 올라 물어볼까나.

“엄마 젖가슴에 안겨/ 옹알거리는 아기// 눈을 감아도 수호천사를 만나/ 무슨 생각을 나누는지/ 연신 하늘에 웃음을 보내는 아기// 보이는 것 중에서 가장 신성한/ 이제 막 태어나는 아가 말// 좋은 시인의 시도/ 태어난 지 세이레쯤 된/ 아이 옹알이 같은/ 눈에 보이는 음악이어라.”(「시」 전문)(2021.2.25)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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