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래현-'운보 아내' 타이틀에 가려진 천재성 재조명

입력 2021. 2. 2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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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학창 시절, 미술관에서 한 점의 추상화를 보고 상당히 놀란 적이 있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매우 독특한 패턴에 색의 조합이 아주 멋진 그림이었다. 하지만 놀란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추상화는 으레 캔버스에 그려진 유화를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 작품은 종이에 동양화 기법으로 그린 것이었다. ‘동양화로 이런 멋진 추상화를 그린 화가가 있구나’ 놀라워하며 작품 옆에 붙은 설명서를 보니 ‘박래현(1920~1976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찌나 인상적인 그림이었던지, 그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됐다.

➊ ‘이른 아침’. 1956년작.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일본 화풍에서 벗어나 한국적인 소재를 통해 동양화의 현대화를 추구하려는 화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며칠 후, 도서관에서 이 화가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더욱 놀랐다. 화가가 여성인 데다가 동양화 거장으로 평가받는 운보 김기창(1913~2001년)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동양화의 새로운 경지를 일군 출중한 화가인데, 어떻게 천재 화가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운보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청각 장애를 지녔다. 장애가 있는 남편의 창작 활동을 수족처럼 챙기고 지원하면서 그런 그림을 그렸다니 더욱 놀라웠다. 그것도 모자라 1남 3녀 자녀에게 부족함 없는 엄마 역할까지 다했다 한다.

세월과 함께 잊고 있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최근 다시 한 번 놀라고 큰 감명을 받게 됐다. 박래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기획한 대규모 회고전(2020년 9월 29일~2021년 1월 3일)이 계기였다. 1940년대 초기 채색화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대한미협전에서 각각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은 1950년대 회화, 1960년대 본격적으로 전개된 독창적인 추상화 그리고 1970년대에 새롭게 선보인 판화와 태피스트리(tapestry·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작업을 총망라해 선보인 전시였다.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예술가가 그렇게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을까.

1920년생인 박래현은 당대 다른 많은 예술가가 그러했듯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그는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인 1943년, 당시 국내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다.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에서 잠시 귀국, 이때 이미 20대부터 동양화단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활동해온 김기창에게 인사차 방문한다. 운보는 그에게 첫눈에 반하고, 5년여에 걸친 구애 끝에 마침내 1947년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➋ ‘잊혀진 역사 중에서’. 1963년작. 물감의 번짐과 농담을 대담하게 활용한 박래현의 동양화 기법 추상화의 좋은 예다. ➌ ‘무제’. 1967년작. 2020년 12월 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300만홍콩달러(약 4억3000만원)에 낙찰돼 박래현 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이들의 결혼은 곧 장안의 화제가 됐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데다 장래가 촉망받는 화가와 장애를 지닌 가난한 천재 화가의 운명적인 만남! 하지만 그는 그때 알았을까. 이 사랑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것은 바로 ‘천재 예술가 김기창의 아내’라는 굴레였다. 물론 남편의 유명세에 힘입어 주류 화단에 보다 쉽게 진입하는 이점을 얻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실력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름을 떨쳤을 것이다. 그러니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강인한 예술가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박래현은 귀국 후, 1946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이듬해 결혼한 후에는 몇 개의 그룹전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시가 ‘부부전’ 형식으로 이뤄졌다. 자신만의 이름을 건 단독 전시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그의 작업이 높은 예술성에 합당한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운보에게 압도당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했다. 그 결실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른 아침(1956년작)’이다.

2m가 넘는 대형화인 이 작품은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머리에 인 네 명의 여인을 활기찬 붓터치로 묘사했다. 그중 한 젊은 여인은 잠든 아이를 등에 업고, 동시에 딴짓하는 아이를 이끌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양새다. 당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을 법한 평범한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다. 이 작품은 박래현이 유학 시절 익힌 일본화풍에서 완전히 벗어나 일상에서 한국적 소재를 발굴하고 이를 현대적 양식의 새로운 동양화로 표현하고자 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종이에 채색 기법의 동양화를 고수하되, 기존 전통에서 탈피하고 당대 흐름을 민감하게 반영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구축하고자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의 결과물로 1960년대 초반부터 추상화를 선보인다. 그의 추상화는 초기 색채 추상과 중반 이후에 전개된 독특한 띠 형태 추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기 추상화 중 대표작 한 점이 지난해 12월 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여러 차례 경합 끝에 300만홍콩달러(약 4억3000만원)에 낙찰됐다. 박래현 작품 가운데 경매 최고가였다. 작품 완성도와 예술성 등을 고려할 때 높은 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국제 미술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다.

1967년작인 이 작품은 1964년과 1965년에 걸친 미국 순회전이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시에서 물감 번짐과 농담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담하게 활용한 박래현의 동양화 기법 추상화는 서양 추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채감과 질감 등 고유의 특성들로 인해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다.

순회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뉴욕을 시작으로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트, 인도에 이르는 긴 해외여행에 나선다. 특히 이 기간 중에 뉴욕 한 박물관에서 접한 미국 인디언의 원시 미술과 이집트와 인도 고대 문명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를 한국의 토속적 소재와 혼합해 국제적으로도 통용될 만한 보편적인 시각 언어를 개발하고자 했다.

그 결과물이 1966년경부터 선보인 띠 형태 추상화다.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 역시 이 양식에 속한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어떻게 완성한 것인지 알아내기 쉽지 않을 정도로 박래현의 후기 추상화들은 정교하고 세밀하다. 그러면서도 질감은 풍부하고, 구성과 색채는 대담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는 장애를 가진 남편을 위한 헌신적인 내조와 네 아이의 엄마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후 판화 공부를 위해 담대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오는 5월 9일까지 이어지는 회고전을 통해 그의 멋진 예술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7호 (2021.02.24~2021.03.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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