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사진가'가 느는 이유

이상엽 2021. 2. 26. 10:20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19세기 중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과 교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미국 뉴욕의 사진가 유진 리처드는 1990년대 중반, 동네 주민들의 코카인 중독을 취재한 사진집 〈코카인 트루 코카인 블루〉를 펴내면서 최고의 사회·인류학자라는 헌사를 받았다.

그때까지 쌓은 능력을 밑천으로 남은 인생 동안 얼마나 길게 '소프트 랜딩'할 수 있느냐가 사진가의 일생을 결정한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14년 손승현 작가가 찍은 일본 홋카이도 다카토마리 조선인 희생자 묘표.

19세기 중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과 교수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은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써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사진에도 재능이 있어서 24년간 앨리스를 닮은 듯한 소녀들의 초상 사진 2700장을 남겼다. 당대 전방위적 지식인의 전형이었을 터이다. 미국 뉴욕의 사진가 유진 리처드는 1990년대 중반, 동네 주민들의 코카인 중독을 취재한 사진집 〈코카인 트루 코카인 블루〉를 펴내면서 최고의 사회·인류학자라는 헌사를 받았다. 이런 평가에는 그의 탁월한 글쓰기 능력이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 리처드의 사진이 사회학적 지식과 결합하면서 엄청난 흡인력을 갖게 된 덕분이기도 하다. 사진은 홀로 위력을 발휘하기보다 주변의 지식과 결합하면 더욱 강력해진다. 항공기술 부문이나 고고학 등에서 사진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일반 전시를 못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꾸며진 사진전 〈70년 만의 귀향: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진행 중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다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주제로 삼은 사진전이다. 작가 손승현은 이렇게 말한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그간 발굴된 유골 115위를 수습한 뒤 징용자들이 끌려간 그때의 길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했다. 2015년 광복 70주년, 한국에서 출발하고 돌아오는 열흘 동안 약 3800㎞의 여정이었다.”

내가 이 사진전에 관심을 둔 이유는 일제의 강제노동과 귀환, 배상 등 소재적 흥미성 때문이 아니었다. 자칫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소재를 정말 진부할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가는 작가의 태도가 돋보였다. 손 작가는 인류학으로 유명한 미국 럿거스 대학에서 시각예술을 공부하며 미국 인디오의 삶에 빠져들었다. 사진가로서 미려한 사진 역시 놓칠 수 없지만 ‘인류학자로서 인디오들 이야기’를 온전히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귀국 후 국내 대학 문화인류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한 그가 한국 민족의 수난뿐 아니라 주변 민족과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찾아낸 소재가 바로 홋카이도의 강제징용 조선인. 피해자인 조선인은 물론 가해자인 일본제국주의자, 다른 피해자로 일본 정부의 탄압을 받던 아이누인, 피해자들을 돕고 지원하던 일본 시민들이 함께 얽힌 현장이었다. 최소 3개 이상의 민족이 얽힌 이 주제는 ‘트랜스 내셔널리즘(초국가주의)’에 기반한 최근 문화인류학과 흐름을 함께하고 있다. 난해한 이론이 사진을 만나며 직관적으로 변한다. 손승현의 작업은 바로 근본적인 인간 이해를 통한 사실의 재현을 추구한다.

미학적 하강을 지식으로 채운다

대체로 사진가들이 가장 미학적으로 빛나는 시기는 작업 10년 차쯤이다. 그때까지 쌓은 능력을 밑천으로 남은 인생 동안 얼마나 길게 ‘소프트 랜딩’할 수 있느냐가 사진가의 일생을 결정한다. 인간의 수명은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사진가에게는 작업할 시간이 늘어난다는 의미이다. 미학적인 하강을 지식으로 채워 넣는, ‘공부하는 사진가’를 많이 본다. 역사학이나 철학 같은 인문학뿐 아니라 물리학에 빠진 사진가들도 있다. 젊어서 소홀했던 것을 분풀이하듯 ‘열공’ 중이다. 누구나 사진을 찍는 시대에도 오히려 작가가 늘어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이상엽 (사진가) editor@sisain.co.kr

싱싱한 뉴스 생생한 분석 시사IN (www.sisain.co.kr) - [ 시사IN 구독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