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생활의 리듬은 베토벤보다 '하농'

정지은 2021. 2. 2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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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출석 체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하농(Hanon) 피아노 연습곡집〉(이하 '하농')이 떠올랐다.

'하농'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에게 매우 요긴한 연습곡집이다.

고교 교사의 기쁨과 슬픔은 하농 연습곡집의 기쁨과 슬픔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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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그림

온라인 출석 체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전화를 돌리던 어느 날이었다. 문득 〈하농(Hanon) 피아노 연습곡집〉(이하 ‘하농’)이 떠올랐다. 내가 하는 일이 매우 하농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농’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에게 매우 요긴한 연습곡집이다. 1980년대 피아노 열풍이 불었을 때 초등학생들은 피아노 학원에 가면 이 책부터 꺼내야 했다. 하농은 손가락 훈련을 하는 데 효과적인 연습곡집이지만 연습곡들이 하나같이 너무 지루하다는 게 문제였다. 사람마다 선호가 다르니 명곡집보다 소나티네가 좋다거나 부르크뮐러 연습곡집이 의외로 좋다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하농이 좋다는 친구는 한 명도 못 봤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조롭고 규칙적인 음표의 배열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전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후 하농은 내게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피아노를 연주해보려고 할 때마다 예전에는 그렇게 싫어했던 하농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오래 연습 없이 방치해둔 굳은 손가락이더라도 며칠 정성껏 하농을 연습하면 취미 연주는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하농은 무표정하고 기계적인 얼굴로 자신의 할 일을 했다.

등하교 시간을 체크하고 급식 지도를 하고 정해진 교육과정에 근거한 교과서를 일정 수준으로 가르치는 등 반복적인 교사의 업무를 생각해본다. 색깔이 분명하고 학문적 입장이 확실한 대학 교수가 베토벤, 쇼팽, 라흐마니노프라면, 고교 교사는 학생들을 ‘훈련’시키는 하농에 가깝다.

고교 교사의 기쁨과 슬픔은 하농 연습곡집의 기쁨과 슬픔을 닮았다. 오래도록 깊은 예술적 여운과 감동을 남기는 베토벤 소나타, 쇼팽의 왈츠곡이 아니라, 나는 그저 n번 연습곡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슬프다. 그러나 비록 연주회장에서 연주되거나 불후의 명작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해도 피아노 연주자의 기초체력을 받쳐주는 피부 속 근육 형성에 큰 기여를 한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그런데 작년 한 해는 역병 때문에 학교의 그러한 하농적 리듬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학교의 학사일정이란 대체로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것이었지만 1년 내내 출렁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리듬의 와해는 교사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학생과 학부모에게 엄청난 곤란을 안겨주었다. 고등학생의 경우 무엇보다 학습 루틴이 흔들린 것은 여전히 후유증과 해결 과제로 남아 있다.

학생들의 바람직한 학습 루틴 만들어야

올해 학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고품질의 수업 영상을 제작하거나 실질적 피드백이 가능한 방식을 모색하고 이미 실천에 옮긴 교사들도 있다. 교사마다, 학교 상황에 따라 구체적 양상은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이 바람직한 학습 루틴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완성도 높고 드라마틱한 명곡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한결같은 하농 n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지은 (서울 신서고등학교 교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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