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사가 젠보짠 "펑위샹 장군은 중국 진보의 상징"

2021. 2. 2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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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 펑이 준 만년필 평생 놓지 않아
"펑의 일기는 가장 진실된 현대사"
위화신, 시아버지 펑의 전기 펴내
초판 25만 부 출간 이틀 만에 동나
위, 돌쟁이 때 태산서 펑과 첫 만남
"펑은 민족해방·경제평등 위해 분투"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65〉
1968년 문혁 발발 2년 후, 비판대에 끌려 나온 젠보짠. [사진 김명호]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은 사후에 총명한 며느리를 봤다. 1978년 가을, 해양지질연구소는 자료실 요원 위화신(余華心·여화심)을 선진공작자로 선정했다. 후보였던 부시장 딸이 씩씩거렸다. “대관료이며 대군벌이었던 펑위샹의 며느리는 자격이 없다.” 위화신은 분을 참기 힘들었다. 조직에 건의했다. “나는 펑위샹의 며느리고 위신칭(余心淸·여심청)의 딸이다. 문혁 시절,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진(自盡)한 생부는 1년 전에 명예를 회복했다. 역사 앞에 당당했던 펑 장군의 가족이 이런 대접 받는 것이 분하다. 장군의 전기 집필을 허락해주기 바란다.” 조직은 선정했다 탈락시킨 위에게 미안했다. 청을 들어줬다.

명문 중학과 대학을 졸업한 위화신은 사료를 다룰 줄 알았다. 1년간 혁명역사박물관과 제2역사당안관, 베이징도서관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펑위샹의 옛 부하들도 찾아다녔다. “펑 장군의 귀국선은 중앙의 지시로 중공 화동국이 마련했다. 소련 측 조사에 의하면 장군이 탄 선박의 화재는 국민당 특무의 소행이었다. 신중국 선포 후 공안국이 베이징반점에 숨어있던 범인을 체포해 처형했다”는 등 처음 듣는 얘기도 많았다.

위화신은 전국정치협상회의(정협) 사무실에 1년간 묵으며 원고를 완성했다. 1980년 봄, 〈馮玉祥將軍魂歸中華〉가 출간되자 반응이 굉장했다. 초판 25만 부가 이틀 만에 동이 났다.

펑 귀국선 화재, 국민당 특무 소행

1952년 11월, 광시성의학원을 시찰 나온 위생부장 리더촨.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1935년 항일동맹군 해체 후 태산에 은거할 때 훗날의 며느리를 처음 만났다. 동맹군 총무처장 위신칭과 부인 류란화(劉蘭華·유란화)가 데리고 온 돌쟁이 딸 위화신을 귀여워했다. 무릎에 앉혀놓고 알아듣건 말건, 온갖 얘기를 다 해줬다. 8년 후 전시 수도 충칭에서 세배 온 위화신을 보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직접 그린 채소에 글씨를 써서 선물했다. “홍당무와 가지 요리는 맛있고 향기도 그만이다. 많이 먹고 압록강까지 달려가자.” 왜 압록강이냐고 묻자 설명해줬다. “동북에 와있는 일본 귀신들을 압록강에 수장시켜야 한다. 너는 기억 못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 8년 전 우연히 너를 만났다. 세상사 모든 시작은 우연이다. 사람은 우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1953년, 푸단대학을 졸업한 위화신은 친구 소개로 펑훙다(馮洪達·풍홍달)를 만났다. “펑위샹 장군의 아들이다. 펑 장군 사망 후 레닌그라드대학과 해군대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위화신은 펑 장군의 아들이라는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어릴 때 펑 장군이 해준 우연이라는 말이 떠오르자 더 이상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만난 지 2개월 만에 동네 파출소에 가서 결혼신고를 했다.

1955년 8월, 대장 계급 수여식을 주관하는 저우언라이. 오른쪽 둘째가 위신칭. [사진 김명호]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위화신이 재미있는 말을 했다. “남편의 장단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배우자다. 나는 시어머니 리더촨(李德全·이덕전)의 말을 신뢰한다.” 리더촨이 생전에 했다는 말도 소개했다. “펑장군은 반대만 하다 세상을 떠났다. 봉건제도를 뒤집어엎고 공화제를 옹호하기 위해 청(淸)나라에 반대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반대하고, 장쉰(張勛·장훈)의 복벽에 반대했다. 군벌 타도와 정치개혁을 주장하며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 장쭤린(張作霖·장작림), 차오쿤(曹錕·조곤),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에 반대했다. 민족해방과 민생의 행복을 위해 일본에 반대하고, 미국에 반대하고,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반대했다. 장군은 이상주의자였다. 분투 목적이 민족해방과 독립국가 건설, 민주정치 구현, 경제 평등 실현이었다.” 펑위샹 사망 후 베이징으로 돌아온 리더촨은 정협 1차회의에 참석, 신중국 초대 위생부장에 취임했다.

문혁 초기, 부인과 함께 자살로 삶을 마감한 대역사가 젠보짠(전백찬·翦伯贊)의 평가가 주목을 끌었다. “펑 장군의 일생은 농민에서 출발해 장군이 되었다가 다시 농민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장군은 한마디로 진보의 상징이었다. 반청, 반군벌에서 시작해 반장(反蔣), 반미(反美)를 거쳐 중국의 해방전쟁을 옹호하기까지 진보를 거듭한, 역사인격의 완성체였다.”

젠·펑 편지 주고받으며 인연 지속

위화신의 생모 류란화(오른쪽). 중앙은 장제스의 동서인 행정원장 콩샹시(孔祥熙). [사진 김명호]
펑위샹의 역사 선생이었던 젠보짠은 펑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겼다. 펑도 마찬가지였다.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1948년 3월 젠이 민주인사들 집결지 홍콩으로 나왔을 때도 제일 먼저 축하편지를 보냈다. “우리 국민들은 운이 좋다. 국가의 큰 행복이다.” 젠은 펑이 일기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편지를 통해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장군의 일기는 가장 진실된 현대사다. 미국 생활을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기록해라.” 귀국을 결심한 펑은 만년필과 유화 한 점도 인편에 보냈다. 그림에 시 한 편을 직접 썼다. “작은 배 타고 높은 산에 올라, 장삼(長衫) 벗어 던지고, 독재와 매국 일삼는 한간(漢奸)을 타도하겠다.” 귀국 도중 인생의 마지막 편지도 젠보짠에게 보냈다.

젠보짠은 죽는 날까지 펑위샹이 보낸 만년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림도 벽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문혁 초기, 마오쩌둥은 묘한 최고지시를 했다. “자산계급 반동학술권위들에겐 출로를 열어줄 필요가 있다.” 두 사람 이름까지 거론했다. “베이징대학 부교장 젠보짠과 철학과 교수 펑유란(馮友蘭·풍우란)은 출로가 필요하다.”

마오의 한마디는 신의 목소리였다. 지상명령이었지만, 홍위병들은 젠보짠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유가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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