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버린 사람들.. '학살-추방' 로힝야, 마르지 않는 피눈물[글로벌 포커스]

조유라 기자 2021. 2.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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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이방인' 로힝야족은 누구인가
지난달 14일 미얀마 국경에 있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촌서 로힝야족 난민 남성이 화재로 불타 버린 잔해 위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2018년 기준 130만 명이 넘는 로힝야족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글라데시에 머물고 있다. 콕스바자르=AP 뉴시스
1일 군부 쿠데타 발발과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로 미얀마의 혼란이 극심한 가운데 시위대 유혈 진압을 주도하고 있는 ‘33경보병사단’이 2017년 8월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족 집단학살을 자행한 부대와 동일 조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들은 로힝야족 민간인 수천 명을 살해하고 집단 성폭행했다. 방화도 저질렀고 400여 개 마을을 초토화했다. 이로 인해 최소 74만 명의 로힝야족이 이웃 방글라데시로 도피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1일에도 보트로 인도양을 떠돌던 로힝야 난민 8명이 탈수증으로 숨졌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과거 로힝야족을 “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언급했다.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아웅산 수지 미얀마 국가고문(76)이 집권 후 서구 일각으로부터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당국의 로힝야족 탄압을 방관하고 묵인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로힝야족은 누구이고 왜 이런 처지에 놓였을까.

○ 갈등 근원은 英 식민지배

흘라잉 쿠데타 사령관
로힝야족은 미얀마 주류 민족인 버마족과 인종 종교 언어가 모두 다르다. 몽골계 불교도인 버마족과 인도유럽계 무슬림인 로힝야족은 외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다민족 다종교 다언어 국가인 미얀마에는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버마족 외에도 샨, 카렌, 라카인, 몬, 카친 등 130개가 넘는 소수민족이 있다. 1948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후 여러 소수민족과의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 미얀마 사회에서 군부가 득세하는 계기가 됐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소수민족에도 포함시키지 않은 채 ‘불법이민자’로 규정하고 있다.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 남동부 치타공과 국경을 접한 미얀마 남서부 라카인주(州)에 주로 거주한다. 라카인의 옛 지명이 아라칸이어서 아라칸 무슬림으로도 불린다. 인구는 미얀마 전체 5400만 명의 약 3.7%인 최대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에도 일부가 거주한다. 로힝야어는 치타공 지역에서 쓰이는 치타공어와 흡사하다. 음성언어로는 큰 차이가 없어 소통이 가능하다. 다만 두 언어 모두 방글라데시 최대 언어인 벵골어와는 많이 다르다.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를 거친 후 아직까지 민족 종교 갈등에 신음하는 많은 나라처럼 로힝야족을 둘러싼 미얀마 내부 갈등의 근본 원인 역시 1824∼1948년 식민통치를 벌인 영국에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 영국은 버마족을 관리하기 위해 인도계 무슬림 등의 대규모 이주를 장려했다. 이들 무슬림에게 세금, 토지 등 각종 혜택을 부여했고 무슬림 역시 버마족 탄압에 앞장서 미얀마인의 원성을 샀다. 식민지배 시절 미얀마 상권을 장악한 인도계 무슬림에 대한 반발과 증오가 같은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으로도 번져 지금까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일본이 미얀마를 침공했을 때 로힝야족은 영국 편에, 버마족은 일본 편에 섰던 것도 양측 갈등을 키웠다. 영국은 자신들을 돕는 대가로 세계대전이 끝나면 로힝야족에게 자치지역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로힝야족은 스스로를 7세기경 미얀마 일대에 도착한 아랍 상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당국의 주장처럼 ‘뜨내기 이민자’가 아니며 1300년 넘게 이곳에서 거주한 ‘토착민’이란 의미다. 반면 군부는 식민지 시절 영국 앞잡이 노릇을 하며 미얀마인을 탄압했고 미얀마에 온 지도 오래되지 않았으니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다.

○ 군부가 대대적 탄압…대부분 문맹

난민촌 로힝야족 아이
1948년 독립 직후만 해도 로힝야족은 미얀마 구성원으로 인정받았다. 로힝야족 출신으로 의회에 입성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인물들도 있다. 1961∼1964년 라카인주 북부에서 짧게나마 자치권도 보장받았다.

1962년부터 군부 독재가 시작되면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당시 쿠데타로 집권해 1988년까지 철권통치를 한 독재자 네 윈(1911∼2002)은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불교 사회주의’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고 로힝야족을 제국주의 잔재로 규정했다. 불교 사회주의는 현실 세계에서의 욕망 자제, 산업 국유화, 배타적 민족주의 등을 기반으로 한다. 네 윈은 대외교역을 대폭 줄이고 외국인을 추방하는 등 쇄국주의 노선을 걸었다.

특히 네 윈 정권은 1982년 미얀마 국민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규정하는 법안을 만들어 로힝야족을 제외시켰다. 라카인주를 벗어나는 이동 또한 엄격히 제한했다. 로힝야 인구를 줄인다며 로힝야족끼리의 결혼을 제한하고 자녀도 두 명까지만 둘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로힝야족은 사실상 기본 인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비참한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기초교육도 받지 못해 대부분이 문맹이다.

2013년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akan Rohingya Salvation Army·ARSA)이란 로힝야 무장단체가 등장하면서 로힝야 민간인의 고난이 더 심해졌다. 이슬람국가(IS) 등 수니파 무장단체와 연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 단체는 종종 정부군 공격 등을 감행해 왔다.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65)은 ARSA 제거를 이유로 2017년 로힝야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를 주도해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시 유엔은 “인종청소 의도로 대량 학살과 집단 성폭행이 자행됐다”며 흘라잉을 포함한 관련자 처벌을 촉구했다. 미국 또한 2019년 흘라잉과 군 수뇌부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재무부 제재 명단에 올렸다. 흘라잉은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에서 왔다는 뜻의 비하적인 표현 ‘벵갈리’로 부른다. 그는 2018년 9월 로힝야족 민간인에 대한 전쟁범죄 혐의를 부인하며 “벵갈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방글라데시다. 그들이 미얀마에 있는 한 미얀마 법에 따라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수지의 외면

아웅산 수지 고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이끌며 2015년 11월 총선에서 네 윈 집권 후 53년 만의 문민정부 출범을 이끈 수지 국가고문 역시 로힝야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지 고문도 로힝야 대신 ‘무슬림’이란 표현을 쓴다.

그는 집권 직후 ‘로힝야’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자신을 접견한 미 외교관에게도 ‘로힝야’란 말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2018년 영국 BBC 인터뷰에서는 “인종청소가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일어나는 일에 사용하기에는 너무 강한 표현”이라며 집단학살을 간접 부인했다.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ICJ)에도 증인으로 출석해 군을 두둔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아이콘이었지만 자국 내 민족 갈등에 대해서는 지배자의 전형적 태도를 고수한 수지 고문에게 서구 사회는 크게 실망했다. 뉴욕타임스(NYT) 등 언론은 “로힝야에 대한 그의 입장은 비겁하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주요 인권단체 역시 그가 받은 노벨 평화상을 박탈하라고 촉구했다. 문민정부 출범 후에도 군이 미얀마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은 모르는 바 아니나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명예와 권위에 스스로 흠집을 냈다는 비판이 거셌다. 로힝야 사태에 대한 애매한 태도로 수지 고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줄어든 것이 군부에 이번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軍, 2020년 총선 무효화…정국 혼란 가속

미얀마 현지 매체 미얀마나우에 따르면 군부는 26일(현지 시간) 수지 고문이 이끄는 NLD가 압승했던 2020년 11월 총선을 무효화했다. 그간 “부정선거가 자행됐다”며 당시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쿠데타로 집권한 후 총선 자체를 아예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군의 계속된 유혈 진압으로 쿠데타 발발 후 이날까지 사망자는 6명으로 늘었다.

정국 혼란 격화로 로힝야 문제가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과거 군부와 미얀마 시민사회 모두 로힝야족을 거부하고 탄압했지만 쿠데타 후 로힝야족과 반정부 시위대가 규합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다급해진 흘라잉 역시 로힝야족에게 유화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다만 군부와 시민사회 모두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도구로 삼을 뿐 정작 이들의 처우 개선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의견이 많다. 쿠데타 정국이 마무리되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양쪽 모두에게 배척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의 로힝야족 지도자 딜 모하메드는 쿠데타 직후 로이터통신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려는 악랄한 시도를 강력히 규탄한다. 국제사회 역시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나서 달라”며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할 뜻을 밝혔다. 현지 소셜미디어에는 젊은 시위대를 중심으로 “로힝야족의 반정부 시위 지지를 환영한다”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역시 “로힝야족은 미얀마 국민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끝내고 정의를 위한 투쟁을 함께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급해진 흘라잉은 8일 연설에서 과거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날 방글라데시 난민 캠프에 있는 로힝야족의 미얀마 송환을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전히 ‘로힝야’란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주도한 집단학살 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로힝야족을 불러들이겠다는 의지를 처음으로 내비쳤다.

수십 년간 군부가 로힝야족에 대한 일반 불교도의 반감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에 이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화해 제스처가 진심이 아닐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최영준 경희대 무역학과 교수(미얀마 지역연구센터장)는 “군부 입장에서 로힝야족은 소수민족에도 포함되지 않는, 변방에서 사고 치는 집단 정도이지만 수지 고문을 공격하기 위해 로힝야족을 정치적 도구로 계속 이용할 것”이라고 했다. 수지 고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형성하고 국제사회로부터 집권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 수지 고문과는 달리 자신은 로힝야족을 포용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는 의미다.

‘군사정권’이란 공동의 적 때문에 그간 터부시하던 로힝야족을 포용하는 듯한 일반 국민의 태도 역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회의론이 제기된다. 장준영 한국외국어대 동남아연구소장은 “대부분의 미얀마인은 로힝야족 문제를 국가안보 위협으로 여긴다”며 불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립이 뿌리 깊다고 진단했다. 미얀마 전문가인 이언 홀리데이 홍콩대 교수 역시 타임에 “이미 미얀마 국민과 로힝야족 간의 분열은 너무나 깊다”며 로힝야족을 향한 미얀마인의 차별적 인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유라 jyr0101@donga.com·신아형·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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