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루, 性的 도발인가 일본 위선의 폭로인가

곽아람 기자 입력 2021. 2. 27. 03:06 수정 2021. 3. 1.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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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학자가 쓴 일본 탐구서
태가트 머피가 쓴 '일본의 굴레'./글항아리.

일본의 굴레

R. 태가트 머피 지음|글항아리|660쪽|3만2000원

교복 치마를 속옷이 보일 만큼 치켜올려서 통통한 허벅지를 드러내며 길고 헐렁한 흰 양말을 무릎 아래로 내려 치렁치렁하게 신고 다니는 젊은 일본 여성들. ‘갸루(gal)’라 불리는 이 여성들의 패션에 대해 일본인들조차 “성적 도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렇지만 미국 출신으로 쓰쿠바대학 국제정치경제학 교수를 지낸 저자는 말한다. “롤리타 패션이나 어처구니없이 짧은 치마를 입은 십대 여자아이들은 변태들에게 성적인 유혹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오히려 천편일률적인 세일러복 교복 안에 여성성을 감추는 전통적인 일본 여성상이 강요되어 온 이면에는 여성의 성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누구나 알아야 하는 지식’ 시리즈의 한 권으로 펴낸 이 책에서 저자는 서구인의 시선으로 일본을 해부한다. 40여 년째 일본에 살고 있지만 그에게 여전히 일본은 ‘모순의 나라’. “일본에서의 성공은 모순을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행동하도록 하는 제도와 관행은 일본인들이 모순을 알아차리지 않기로 의도적이고 집단적으로 결정한 듯 보이는 데서 종종 드러난다. 무능한 조직원을 관리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예. “일본의 조직에서는 누군가 눈에 띄게 무능해도 해고되지 않는다. 대신에 모두들 알려주지 않아도 그 사람이 주의 대상인 것을 ‘안다’. 그 사람이 하던 모든 중요한 일은 반자동적으로 더블 체크되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 한다. 하지만 그가 업무에 부적격하다는 공식적인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인공적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머리를 허옇게 표백하거나 교복 치마를 속옷이 보일 만큼 짧게 치켜올리는 등 다양한 여성 페르소나를 칭하는‘갸루’는 일본 사회의 여성에 대한 통념에‘이단옆차기’를 날리는 존재들이다. 사진은 도쿄 시부야 거리의 갸루들. /마이니치신문

섹스는 에도시대에 화려하게 꽃핀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공공연한 뿌리이자 원동력이었다. 게이샤를 중심으로 ‘사교 세계’가 형성되었고 풍류 세계의 섹스 산업에서 예술이 탄생했다. 가부키는 17세기 초 처음 등장했을 때 마치 현대의 스트립 폴 댄스 같았다. 저자는 “나중에 일본인들이 서양인들의 도덕관념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정통 일본 예술의 뿌리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다”고 말한다. 중매 결혼이든, 성매매든, 사무라이 간의 동성애든 대부분의 성관계가 두 사람 중 한쪽의 일방적 요구에 따라 불평등하게 이루어지던 시대, 사람들의 ‘판타지’는 ‘서로 간에 진정한 애정이 오가는 섹스’였다. 그리하여 우키요에로 주로 제작되던 이 시대의 춘화(春畵)엔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간절히 원하나 얻을 수 없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의 로맨틱한 관계의 파생물인 열정과 흥분이 담겼다. 저자는 “에도 시대의 많은 출판물이 위대한 예술 작품이기도 한 이유는 그 때문”이라 해석한다.

헤이안 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적 맥락과 함께 일본의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짚은 책. 개괄서지만 논지와 관점이 또렷하다. 저자는 “일본 우익은 중국과의 공존보다는 미·일 동맹을 선호하지만 미국 엘리트 지도층은 일본을 미국의 군사적 자산, 꿈을 이루기 위한 도구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면서 “과거사를 사과한 후 다시 아시아의 일원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한국과의 관계,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시각은 특히 명확하다. 저자는 “많은 일본 남성, 특히 자민당을 지지하고 국수주의 언론에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있어 한국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성(性)에 관한 일은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동아시아 특권층 남성들 사이의 묵계를 위반하는 일이다. 이들은 한국이 이를 위반한 것에 대해 화는 나지만 왜 화가 나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고 적었다. “그래서 이들은 말은 제대로 못 하고 화가 난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정서를 외부인들은 잘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모두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 엄마의 치마폭으로 도망가는 어린아이와도 같다. 엄마의 넓은 치마에 안겨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든지 고등학교 교과서를 수정한다든지 하는 행동으로 한국과 중국에 놀리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모성애건 무엇이 되었건 일본에 어떤 종류의 애정도 갖고 있지 않다.”

일본을 보는 여러 렌즈 중 하나라 여기고 참고하면 좋을 책. 방대한 주제를 한 권에 다루고 있어 정밀함은 다소 떨어지지만 무릎을 치게 만드는 통찰이 곳곳에 반짝인다. 원제 Japan and the Shackles of the Past.

기타가와 우타마로의 우키요에, '찻집 2층에서'./영국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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