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도 '무연고자' 장례식장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입력 2021. 2. 2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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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 죽음을 기억하다] 11월 장례이야기

[부용구 나눔과나눔 활동가]
심각해지는 코로나 상황에 무연고 장례 참여 인원 줄어

2020년 10월까지 잠시 잠잠해지나 싶었던 코로나 상황은 11월 들어 확진자 수의 증가세가 두드러졌고, 최근(12월)에는 하루 5~6백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는 등 대유행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의 단계가 한층 강화되어 11월 중순 이후 무연고 사망자 장례에는 자원활동가들의 참여가 제한되었고, 서울시 공영장례 상담업무를 맡고 있는 나눔과나눔의 활동가와 의전업체 직원 등 최소 인원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례를 함께 치르고 싶어도 여건상 참여할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들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동행하지도 못하니 먼발치에서 그저 마음만 졸일 뿐입니다.

▲ 코로나 상황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딸이 중국에서 보내온 편지. ⓒ부용구

코로나로 한국에 오지 못하는 딸의 편지

11월 말 장례를 치른 무연고 사망자 ㄱ님의 장례에는 고인과 10년 넘도록 각별한 관계를 맺고 지냈던 목사님과 손위 처남이 참석했습니다. 서울시립승화원(이하 승화원) 접수실 직원의 안내로 나눔과나눔 활동가를 만난 두 사람은 무연고 장례가 치러진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습니다.

"무연고자도 장례를 치러주나요?"

활동가의 안내를 받고 공영장례 전용빈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려진 제단에 직접 준비해온 영정사진을 올린 후 참아왔던 눈물을 쏟았습니다. 두 사람은 장례를 치르지 못했던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ㄱ님은 60대 중반의 중국인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다 지난 10월 말 서울시의 한 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중국에 있는 아내와 딸은 병원비를 지불하고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입국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딸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에 있는 외삼촌에게 장례를 부탁했지만 장례식장에서는 연고자가 아니라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결국 ㄱ님은 무연고자로 확정되었고 장례절차를 문의하니 장례식장에서는 화장절차만 안내해주었습니다. 외삼촌은 공영장례에 대한 안내는 듣지 못했고, 화장 당일 승화원에 도착해서야 장례를 치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연고자는 변사체처럼 그냥 버려지는 건 아닌가 싶어 화장이라도 제대로 하는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동행한 목사님은 공영장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과 절차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교인들과 함께 제대로 된 예배로 추모를 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장례를 준비해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ㄱ님은 중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한국에 와서도 평생교육원을 졸업할 만큼 학구파였습니다. 준비해온 영정 속 ㄱ님은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점잖은 모습이었습니다.

장례식이 시작되고 손위 처남은 주머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습니다.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딸은 아버지에게 못다 한 이야기를 글로 써서 외삼촌에게 보냈습니다. 외삼촌은 한국어로 번역한 조카의 편지를 나눔과나눔 활동가에게 전했고, 딸의 목소리를 대신해 나지막이 빈소를 채웠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랑하는 아버지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딸의 애틋한 마음은 아버지의 관 위에 놓였고 함께 화로로 들어갔습니다.

▲ 고아로 자란 남편의 무연고 장례. 사실혼 관계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의 이름이 적힌 지방을 태우고 있습니다. ⓒ부용구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 남편 "사랑했어요"

50대 중반에 무연고 사망자가 된 ㄴ님의 장례에 참석한 한 여성은 고인예식이 시작되기 전 자신을 고인의 누나라고 소개했습니다. 조사를 읽던 여성은 갑자기 읽기를 멈추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었고, 힘겹게 글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예식이 끝나 의전업체 직원들이 빈소를 나간 후 위패를 챙기던 활동가와 눈이 마주친 여성은 "사실은 제가 누나가 아니고, 전부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ㄴ님은 고아로 자랐습니다. 40여 년 전 같은 동네에 살았던 아내는 "누나야, 누나야~" 하던 아홉 살 연하의 ㄴ님을 남달리 대했습니다. 부모 없이 지내는 게 마음에 걸렸고, 한때는 나쁜 길로 들어서 방황하는 모습도 보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곁에서 챙겼습니다.

"부모를 찾아보자고 권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부모를 만나면 자기 손으로 죽일 것만 같다고 하더군요."

ㄴ님은 생각보다 마음의 병이 컸습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는 평생토록 ㄴ님을 괴롭혔습니다.
"한번은 여자 친구라며 데려온 적이 있었어요. 참해 보여서 잘해주라고 했는데, 사고로 떠나보냈어요."

이후 충격으로 방황하는 ㄴ님을 보살폈고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의 정도 깊어졌습니다. 생전 ㄴ님은 완벽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무슨 일이든 허투루 하지 않았습니다. 1급 요리사 자격증도 따고,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청결에 힘을 써 손님들이 신을 벗고 들어갈 정도로 깔끔하게 장사를 했습니다. 넉넉하게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았지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로 일이 없는 날이 많아지니 안 하던 도박에 손을 댔어요. 그러다 하루아침에 3000만 원을 날렸죠. 식당 일이 없으니까 목수 일을 배웠어요. 근데 경기가 안 좋으니까 대금을 받지도 못하는 거예요."

정신을 놓고 도박에 빠진 남편이 미워 아내는 연락을 끊었습니다. 전화가 여러 번 왔었지만 자신이 받아주지 않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서 아내는 모질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ㄴ님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자살했어요. 그때 전화를 받아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했다면 안 죽었을 거예요. 내가 죽인 거예요. 전화만 받아줬어도……."

ㄴ님은 자신이 죽으면 어릴 적 뛰어놀던 동산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아였기에 연고자가 없었고 사실혼 관계를 증명할 만한 서류가 없었습니다. 인우보증(다른 사람의 어떤 법률적 행동에 대해 보증을 서주는 것)을 서줄 사람을 찾아보려 했지만. 아내는 남편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달갑지 않았습니다.

ㄴ님의 유골은 무연고 추모의 집에서 5년간 보관될 예정입니다. 장례예식이 끝나고 승화원 유택동산에서 남편의 이름이 적힌 지방을 태웠습니다. 불이 꺼지며 연기는 흩어졌고 이름은 재가 되어 남았습니다. 아내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편한 데 가서 잘 쉬어요. 사랑했어요."

▲ 30대 초반에 사망한 조카의 무연고 장례에 참석한 이모. 아이를 안고 지방에서 올라와 조카의 관이 화로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부용구

아픈 손가락…… 일찍 혼자된 조카의 무연고 장례식

11월 중순 30대 초반의 한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무연고 사망자 ㄷ님은 지난 10월 말 서울시의 한 병원에서 심내막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고, 연고자가 없어 무연고자로 확정되었습니다.

아이를 안은 한 여성이 빈소에 들어왔습니다. 얼굴을 마주치자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화장 끝나고 유해를 모셔갈 수는 없나요? 제가 지방에서 올라왔어요. 두 번 걸음 하기가 힘들어서 서류도 다 준비해왔는데요."

여성분과 고인은 생전에 서로 이모, 조카로 불렀던 그나마 제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혼자 살아가던 조카가 늘 안쓰러웠던 이모는 자신이 시신을 인수할 수 있는 연고자 범위에 속하지 않아 무연고자가 된 조카의 유골이 무연고 추모의 집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듣고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이모로부터 전해 받은 제적등본, 신분증 등을 가지고 나눔과나눔 활동가가 승화원 접수실로 향했습니다.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서울시 공영장례가 자리 잡으면서 최근 지자체 담당자의 재량권으로 유골을 모셔갈 수 있는 사례가 있었던 터라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해당 지자체로 문의를 했습니다. 다행히 담당자는 사정을 듣고 유골을 모셔갈 수 있도록 관련 공문을 승화원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했고, 승화원 직원도 급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화장절차가 진행된다는 예고방송이 나왔고, 활동가는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접수실을 나와야 했습니다.

서울시 공영장례 전용빈소에서 고인예식이 시작되었고, 조사 낭독을 하던 이모는 참석했던 자원봉사자들이 숙연해질 정도로 오열을 하며 한 문장씩 읽어 내려갔습니다. 18개월 된 조카까지 우는 엄마를 따라 같이 우는 바람에 빈소는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조카가 저한테는 아픈 손가락이었어요. 부모가 먼저 돌아가시고 혼자 지냈는데, 조카가 몸이 많이 아팠거든요." 이모는 조카를 못 본 지 벌써 1년가량이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때문에 위험하니 올라오지 말라는 조카에게 이모는 그저 두 달에 한 번씩 반찬을 택배로 보내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 수습과정에서 크기가 상당한 보철물이 섞여 있었습니다. 살아서도 많이 아파했던 조카 생각에 이모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례가 끝나기 전 나눔과나눔 활동가는 해당 주무관으로부터 공문을 팩스로 전송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다행히 고인의 유골을 모셔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모께 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산에 꼭 뿌려줄 거예요." 장례 내내 우느라 눈이 퉁퉁 부은 이모의 눈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고, 다시 또 눈물이 흘렀습니다.

사는 동안 아픈 손가락이었다는 조카를 먼저 떠나보낸 이모의 마지막 모습이 밝아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관보도 씌우지 않은 무연고 사망자의 관. ⓒ부용구

무연고자를 대하는 불편한 시선

11월 한 달 동안 서울시 공영장례는 총 40회가 진행되었습니다. 79명의 무연고 사망자를 만났고 이는 올해 가장 많은 숫자였습니다. 12월 초 무연고 사망자의 숫자는 이미 600명을 넘었습니다. 작년 한 해 발생한 전국의 무연고 사망자가 2500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서울시에서만 4분의 1에 육박하는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연사는 일상화되어 가고, 하루에 두 번씩 네 분의 무연고 장례를 치르는 날도 10일이나 있었습니다.

많은 장례를 치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무연고 사망자를 대하는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들을 마주할 때였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온오프라인으로 만나는 이들, 이를테면 무연고 사망자 공문을 담당하는 공무원, 함께 살았던 연고자와 지인들, 그리고 장례식장, 병원 관계자, 자원봉사자 등 생사의 갈림길에서 만난 이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들의 말 속에는 무연고 사망자들을 대하는 각자의 시선들이 담겼습니다.

"시신을 위임해놓고 유골을 모셔가는 건 웃기잖아요?" – A 지자체의 무연고 담당자
"서울시에서 이렇게 다 해주니까 포기해버리는 거예요." – B 종교자원봉사자
"나는 90살 전에 죽을 거야. 가족들한테 민폐 끼치면 안 되니까." – C 자원봉사자
"사망진단서에 패혈증으로 적혀 있으니 그냥 패혈증으로 하세요. 무슨 상관있어요. 무연고인데." – D 요양병원 관계자
"그게 무슨 문제가 되었나요?" – 관보도 씌우지 않고 결관해서 발인한 E 장례식장 직원과 보자기를 빼고 유골함만 보낸 F 장례식장 직원
"자식이 몇인데 무연고야?" – G 장례 관계자
"유골함에 한지가 얇아서 찢어지니 그냥 유골함에 부을게요." – H 장례 관련자

서울시의 무연고 공영장례가 최근 서울 시민들이 선정한 최우수 서비스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좋은 제도로 자리 잡아나가고 있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많은 장례를 치르며 사회적 추모에 대해 안내하고, 무연고 사망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소개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연고 사망자에 대해 자신의 시선에서만 보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몇 차례 교육을 진행했지만 아직도 공영장례를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들이 있고, 고인과 마지막 동행을 자처한 자원봉사자들 입에서도 자신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로 폄하하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무연생을 살던 생전에도, 사망 후 무연고자가 되어서도 ‘그런 소리’들을 듣습니다. 서럽기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진정한 사회적 애도가 살아 있는 정말 좋은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성숙한 사회로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부용구 나눔과나눔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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