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승리호와 안철수

백승찬 문화부 차장 2021. 3. 2.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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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승리호>는 혁신적이진 않지만 안정적인 영화다. 애초 지난해 여름 개봉을 목표로 했으나,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상황으로 시기를 미루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조성희 감독은 개성이 넘쳐 때로는 기괴해 보이는 영화를 만들곤 했다. 200억원대 중반의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에서 다수 관객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는지, <승리호>에는 감독의 개성이 조심스럽게 감춰져 있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그래도 영화 곳곳에는 성수기용 상업영화의 감수성을 뚫어내는 지점이 있다. 잃어버린 순이에 대한 김태호(송중기)의 애정은 전형적인 부녀 관계에 기인한 것처럼 보이지만, 순이와 김태호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입양 가족이다. 애초 무시무시한 테러조직처럼 소개되는 검은 여우단은 사실 행동주의적 환경단체이며 다양한 인종, 젠더, 언어사용자로 구성돼 있다.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업동이다. 유해진이 목소리로 연기하는 업동이는 인명살상 전투에 특화된 로봇이다. 업동이는 인간 여성처럼 보이기 위한 피부이식 수술 비용을 위해 승리호에서 돈을 번다. 업동이의 외양과 내면이 시스젠더적인 범주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는 이는 소녀 꽃님이다. 꽃님이가 업동이에게 ‘언니’라고 부르자, 업동이는 볼이 빨개지며 좋아한다. 남성 목소리를 내면서 여성 정체성을 가진 로봇을 ‘트랜스젠더’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호하지만, 한국뿐 아니라 해외의 어느 SF에서도 이러한 정체성의 로봇은 희귀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토론에서 금태섭은 “서울시장으로서 퀴어축제에 나갈 생각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안철수는 “차별에 반대한다”면서도 “거부할 권리도 있다”고 답했다. 안철수는 퀴어축제를 서울광장이 아닌 도심 바깥에서 진행하면 좋겠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퀴어축제의 성적 수위가 높아 아동·청소년에게 노출될까봐 걱정하는 시민들이 많다는 의견도 전했다. 하지만 안철수의 걱정대로 퀴어축제의 표현 수위가 너무 높아 위험한 수준이라면, 서울광장이 아니라 전국 어디서도 열려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평소 야당 정치인들의 언행을 사사건건 비판하던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은 이번에는 침묵했다. 안철수의 생각에 동조하거나, 본심을 말했다가는 표를 잃을까봐 ‘전략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 중요 사안에 대해 의견을 밝혀 시민들의 판단을 구해야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비겁하고 부적절하다.

안철수와 같은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는 않다.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지만, 우리 동네에는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는 사랑스럽지만, 노키즈존은 필요하다’도 같은 논리다. ‘너희들의 존재는 알았으니 이제 안 보이는 곳으로 비켜달라’는 요구에 어떤 사람들은 아예 세상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다. 수많은 성소수자 친구들의 자살을 목격하고 생존자를 위로했던 트랜스젠더 활동가 김기홍씨는 지난달 “너무 지쳤어요. 삶도, 겪는 혐오도”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기생충>이 불평등을 논하고 <승리호>가 소수자와 어깨동무한 사이, 세계적인 메트로폴리스 서울시장 후보들은 토건 공약을 내걸고 소수자를 내쫓는다. 이 행태를 묘사하는 데 지체, 퇴행, 졸렬, 기만 정도의 어휘로는 부족하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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