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경제직필]학술적 기만과 혐오의 정치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입력 2021. 03. 03. 03:00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경향신문]
성노예 문제와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전쟁범죄에 대한 문서화된 증거는 이미 한국을 비롯한 피해 당사국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위원회, 미국, 일본 정부에 의해 발간된 보고서들에서 확인되었고 일본 정부가 공개하지 않는 수많은 공문서 속에 아직도 묻혀 있다. 일본군과 정부가 주도적으로 위안소의 설치와 관리를 계획하고 실행했음이 명백히 드러났고, 무엇보다도 피해 당사자들의 일관된 증언과 일본군 관련자들의 자백이 전쟁범죄의 참상을 생생히 말해주고 있다. 이런 모든 자료들이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증거로 충분하다는 것이 국제인권 규범이 담은 보편적 인권에 대한 상식이다. 1996년 유엔인권위 보고서가 내린 판단이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할 것을 권고했다. 일본 정부도 수차례 도덕적 책임을 인정했으나 법적 책임은 부인하고 있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불행하게도 보편적 인권에 대한 현대의 상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를 비롯한 친일학자들의 고집이다. 이들은 이미 밝혀진 수많은 문서와 증언 자료들을 폄하하고 논점을 위안소의 운영을 누가했는가라는 부차적인 문제로 돌린다. 민간이 했다면 논문에 쓰여 있듯 ‘어떤 산업에서나 사기는 있기 마련이다’라는 태도다. 반인륜적 인권침해가 만연했던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기본적 자질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램지어는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생생히 기록한 위안부 피해자들과 군 관련자들의 증언을 무시한다. 반대로 위안부 생활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13세’ 일본 소녀와 어느 한국 여성의 특이 사례를 중요한 자료처럼 논문에서 인용한다.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수많은 증언은 버리면서 유리한 증언은 선택적으로 채용하여 연구 진실성을 스스로 해하고 있다. 램지어가 잘 훈련된 역사학자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떻게 이런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 있었을까? 논문이 게재된 학술지는 역사학이 아니라 법경제학 분야다. 이 논문은 법경제학의 탈을 쓰고 역사왜곡을 끼워 팔고 있다. 한국의 친일학자들이 ‘한국과 일본의 교역’을 연구하면서 “일제의 수탈은 없었다”는 역사왜곡을 끼워 파는 것과 마찬가지다.

유물이나 역사적 기록에 나타난 상거래 관행의 합리적 근거를 찾는 연구가 1990년대 일군의 제도경제학자들에게 유행했다. 여기서 합리적 근거는 어떤 관행이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경제주체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다. 게임이론은 이처럼 계산적인 주체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경제이론이다. 램지어도 초창기에 이런 제도경제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성산업에서 포주와 매춘부 간의 도제계약을 연구한 논문을 1991년 꽤 저명한 법경제학 분야 학술지에 게재했다. 성매매와 관련된 사회적 불명예와 위험 때문에 충분한 수익이 확실하지 않다면 여성은 포주와의 계약을 꺼리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주가 큰돈을 미리 대출해주고 여성이 일하면서 갚는 방식의 도제계약이 이루어진다. 이 논문에서는 이런 결론에 역사왜곡을 끼워 팔지는 않았다. 성산업은 지금 선진국에서도 자발적 의사에 반하는 폭력과 강압이 만연한다. 이런 산업에서 벌어진 일을 게임이론의 계약관계로 설명하는 것은 자발적 의사가 아닌 사실을 자발적 계약으로 오해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논문에서 램지어는 이런 오해를 경고한다.

초창기 논문에서 보였던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은 논란이 된 논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태평양전쟁에서의 매춘 계약’이라는 도발적 제목을 달았다. 이번에도 법경제학 분야 학술지다. 1991년 논문의 축소판에 가까워 법경제학적 공헌은 없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끼워 파는 역사왜곡은 도를 넘었다. 일본군 위안소가 사인 간의 자발적 계약관계로 운영되었고 일본군과 정부의 책임과 무관하다는 역사왜곡이 논문의 주요 공헌보다도 더 강조된다. 이런 결론은 게임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도 학술지는 일방적 역사왜곡을 걸러내지 못했다. 출간 전 연구논문판은 역사왜곡이 논문의 주목적임을 드러낸다. 정대협을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단체라 하고, 한국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박해하는 사회이고 탄압받는 대표적 학자로 지만원씨를 거론한다. 역사왜곡만큼이나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한국과 중국에 대한 혐오는 오랫동안 일본 보수정치의 휘발유였다. 그것이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했고 식민지 수탈의 명분이었으며 지금도 보수정치의 지지기반이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제국의 탐욕을 미화하는 학술활동도 계속될 것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