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의 기본은 성의를 다해서 듣는 것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 (13)]

2021. 3. 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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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인기 직종은 소피스트였다. 민회나 법정에서 토론하고 설득하려면 말을 잘하는 능력이 중요한데, 소피스트는 어떤 말을 어떻게 풀어내 청중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가르쳐 돈을 벌었다. 어느 날 ‘일타 강사’ 코락스가 제대로 못 배웠다고 주장하는 제자 티시아스로부터 교습비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당했다.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 이긴다면, 나는 교습비를 돌려받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이 소송에서 진다면, 바로 그 사실이 내가 못 배웠음을 증명하므로 돈을 돌려받아야 한다.” 스승은 이렇게 받아쳤다. “내가 티시아스에게 뭔가 가르쳤다는 것이 증명되면, 나는 소송에서 승소하고 따라서 교습비를 돌려줄 필요가 없다. 만약 내가 이 소송에서 진다면, 바로 그 사실이 티시아스가 잘 배웠음을 증명하므로 돈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 혼란에 빠진 배심원들은 스승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쁜 까마귀(코락스)가 나쁜 알을 낳았도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구두 변론을 가볍게 여기는 이유는

1983년 어느 날 오후, 사법연수원 동기생과 함께 민사재판을 처음 방청했다. 변호사는 옆 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말했고, 판사도 거의 묻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도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소송당사자는 여전히 말할 시간이 부족하다. “말이 길어지면 제지하죠. 자기 할 말만 딱하고. 재판도 자꾸 여러 번 하는 거예요. 10분하고 다음 재판은 두 달 뒤에….” 이런 불평은 판사 불신으로 이어진다. 판사들은 판사실에서 기록을 잘 읽어보겠노라고 말했고 실제도 그렇지만, 시민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법률은 말로 변론하도록 규정하지만, 변호사는 문서 작성에 힘쓰고 구두 변론을 가볍게 여긴다. 이유는 무엇일까? 민사재판에서 판사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건을 알지 못하므로, 민사소송법은 미리 준비서면으로 공방할 내용을 제출하도록 한다. 변호사는 법정에서 그 문서에 따라 직접 말해야 하지만 시간이 걸리므로, 실무에서는 이미 읽어본 것을 전제로 “2020년 10월 30일자 준비서면을 진술합니다”라고 말했다. 형사재판을 맡은 판사는 증거를 조사할 때 수사하면서 진술자가 말한 대로 검사가 조서를 작성했는지, 조서에 기재된 내용을 믿을 만한지 확인한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 절차가 엄격히 시행되지 않으면서, 검사가 만든 조서가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이른바 조서재판)

역사적으로 볼 때 재판의 엄숙성이 강조되고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을수록 법률가가 작성한 서면을 중시했다. 심지어 “서면에 기재된 것만이 진실이고 서면에 기재되지 않은 것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법언이 통할 정도였다. 변호사가 만든 서면은 한쪽을 두둔하거나 대변하는 것이고, 검사가 만든 조서는 비공개 검사실에서 일방적으로 추궁한 것으로 진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많다. 판사는 당사자가 사실관계를 충분히 설명하고 법적 의견을 낼 수 있도록, 서면의 중요 내용을 말하게 하고 논쟁을 효율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청송(聽訟)이나 히어링(hearing)이라는 말에서 보듯, 재판은 판사가 법정에서 말을 듣는 절차다. 법정에 나온 사람은 처음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고인은 어떻게든 위기에서 빠져나가려 애쓴다. 변호사는 유리한 쟁점은 부풀리고 불리한 쟁점은 희석시키며,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판사는 그 말을 자르거나 질책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과신, 타인에게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금물이다.

법정 분위기를 온화하고 부드럽게

근심, 긴장, 당황, 초조, 불안감, 흥분, 스트레스를 겪는 당사자에게 짧은 시간에 요령 있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어느 당사자는 법정에 들어왔을 때 느낌을 이렇게 말한다. “법정에 앉아서 기다릴 때는 어린아이가 엄마한테서 무슨 잘못을 저질러 판정을 내려주길 바라는 것처럼 있게 돼요. 아무 잘못이 없어도 일단 굉장히 떨리잖아요.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조마조마한 거예요. 거기 가서 진실을 이야기하면 되지 하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일단 그 상황이 되면 떨리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에요.”

판사는 온화하고 부드럽게 법정 분위기를 이끌어 의사소통이 잘되도록 해야 한다. 이해가 안 되는 경우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하라고 다그치지 않고 차분히 되묻는다. 어려운 법률용어는 쉬운 우리말로 풀어서 사용한다. ‘나 홀로 소송’에서는 “원고의 주장은 이런 것이지요”라는 말로 정리한다. 재판을 끝낼 때 “이 사건과 관련해 제일 억울한 점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시민은 변호사라면 말을 잘하리라고 생각하지만, 법대 위에서 보면 다 그렇지는 않다. 당사자가 직접 나온 경우 더욱 그렇다. 〈변호사 논증법〉을 쓴 최훈 교수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네가지 논리’를 소개한다. ①상대방의 주장에 자비를 베풀어 최대한 합리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라. ②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방 논증에서 그 근거를 찾아라. ③입증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회피하지 말고, 상대방이 가진 입증할 권리를 침해하지 마라. ④논점에서 벗어나지 마라.

예를 들어보자. 오래전 어린이 TV 프로그램 〈꼬꼬마 텔레토비〉의 ‘보라돌이’가 게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당신이 변호사라면 어떻게 대응할까? ①보라돌이가 게이라 할지라도 변호한다. ②역삼각형 뿔, 보라색, 빨간 핸드백은 정말 게이의 상징일까? ③게이라고 주장한 네가 근거를 제시하라. ④그런데 보라돌이가 게이인 게 왜 중요한 건데?

우리는 누구나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고, 옳고 그른 건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아는 법이다. 실체적 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설득과 토론을 통해 파악되고 구성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듣고 모두가 참여하는 체제다. 이 말이 모두 맞으면, 판사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을 경청할 직무상 의무가 있다. 설령 변호사가 티시아스처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떼를 쓰더라도. 조선의 가장 뛰어난 법학자이자 재판관인 정약용 선생은 1818년 쓴 〈목민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송사를 처리하는 기본은 성의를 다해 듣는 것이다(聽訟之本 在於誠意).”

박형남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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