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정전사태, 에너지 독립의 고립

2021. 3. 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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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영하 20도를 밑도는 역대 최고의 한파가 닥치면서 텍사스 주민 약 3000만명 중 500만명 이상이 정전사태를 경험했다. 주민 대부분은 식수와 음식 부족으로 한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아무리 예상 밖의 강추위가 닥쳐 왔다고 하지만 미국에서 개발도상국에서도 흔치 않은 정전사태가 일어나고, 눈을 녹여 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미국 텍사스주 애빌린의 한 가구점 주차장에서 노동자들이 판매할 땔감용 장작을 옮기고 있다. / AP연합뉴스


이번 사태는 미국의 연방제와 분권정치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문제의 핵심을 적확하게 꿰뚫어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미국의 분권정치의 폐해, 작은 정부를 추구하는 보수 정부의 허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텍사스주는 인구와 면적에서 미국 50개주 중 두 번째로 큰 주이다. 원래 멕시코 땅이었다가 1836년 텍사스 공화국으로 독립했고, 1845년 미국의 28번째 주로 편입됐다. ‘Lone Star State(외로운 별 주)’라는 별명을 가진 텍사스주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서부 개척 프런티어 정신 및 문화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근까지도 정서상으로는 연방정부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연방정부로부터 독립 추구

텍사스주의 연방정부로부터의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움직임은 법, 제도, 세금 등 다양한 부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이러한 텍사스주의 연방정부로부터의 독립, 자치가 얼마나 큰 경제적·물질적 피해와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가져오게 됐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의 50개주의 전력망은 텍사스주를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동부 전력망과 서부 전력망으로 나뉘어 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특정 주나 지역에서 전력 공급에 차질이 있어도 전력이 풍부하고 남는 주에서 연결해올 수 있기 때문에 정전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이번에 텍사스에 닥쳐온 한파는 이웃 주인 오클라호마, 아칸소주에도 동일하게 닥쳤지만, 이들 주에서는 정전사태가 나타나지 않았다. 같은 주에서도 다른 전력 공급망을 사용하고 있는 엘파소에서도 정전사태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텍사스주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deral Energy Regulatory Commission)의 구속을 받지 않으려고, 자체적으로 1970년대부터 ERCOT(Electric Reliability Council of Texas)라고 불리는 텍사스 전기신뢰성위원회라는 공기업을 통해 전력 공급망을 책임지고 있다. 문제는 이 공급망이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의 규제를 피하려다 보니, 다른 동부지역이나 서부지역 전력망과의 연결을 시스템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전기 부족 사태가 와도 다른 지역에서 전력 공급을 받을 수 없었고, 이번 정전사태를 맞게 된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담요를 뒤집어쓴 시민들이 프로판가스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AP연합뉴스


7000달러짜리 전기 고지서 받은 주민도

2011년에도 비슷한 한파가 있어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 한파에 대비한 월동 대비 시설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를 묵살하고, 현상유지를 했다. 그 바람에 이번 한파 때 많은 시설이 동파되거나 작동되지 않았다.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자체적인 대비도 소홀했다.

더군다나 전력 공급은 ERCOT가 책임지지만 판매는 일반 전기회사가 자유롭게 가격을 정할 수 있도록 1999년 허용된 뒤 전기료가 그 전에 비해 64% 이상 상승했다. 이번 사태 직후 어느 텍사스 주민은 이번 달 전기료로 무려 7000달러(770만원)나 되는 고지서를 받고 아연실색하게 됐다. 규제 철폐를 통한 이익이 소비자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결국 기업에만 막대한 이익이 돌아간 것이다.

텍사스주는 미국의 어느 주보다 석유와 천연가스 등이 풍부해 에너지 최강주로 손꼽혔다. 텍사스주는 이를 기반으로 에너지 독립이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큰 정부로 대표되는 연방정부에 대한 반감으로 규제를 피해 그들만의 에너지 독립 정책을 추진하려던 것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꼴이 됐다. 그 결과 텍사스 주민은 막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와 손실을 겪게 됐다.

지난 대선을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가 근소한 차이로 좁혀지면서 텍사스주는 앞으로 ‘스윙 주(특정 정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주)’가 될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왔다. 이번 정전사태를 통해 그러한 전망이 더 빨리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기후변화가 미국 정치 지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틀림없다. 누구에게는 한파로 닥쳐올 것이고, 누구에게는 따뜻한 봄날로 돌아올 것이다.

유승권 미국 미주리대 한국학 연구소장▶ 주간경향 표지이야기 더보기▶ 주간경향 특집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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