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균 도시' 세종에서 기자가 할 일 [꼬다리]

입력 2021. 3. 3. 09:2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간경향]
세종의 사소한 일상에서 외외성과 행복을 찾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 간의 거리감도, 단조로운 풍경도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람들이 세종시의 첫인상이 어떻냐고들 묻는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세종에서 앞으로 기획재정부와 같은 출입처만 보고 살아야 하는 내 처지를 은근히 궁금해하며 건네는 질문이다. 초반엔 북적거리던 서울과 비교해 한적한 세종이 좋다고 답했다. 정부세종청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행정타운은 마치 서독 본의 행정기관 절반을 흡수했다는 독일 베를린과 겹쳐 보였다. 세종시가 고유 색채로 개발했다는 회색톤(회색을 고유하다고 보는 발상!) 건물은 무채색 도시 베를린에 유학 온 것만 같은 느낌을 더 부추겼다. 2021년 세종 생활은 이러한 정신승리로 시작했다.

이 도시는 여러모로 독특했다. 세종은 층간 소음이 없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건축 시공이 남다른 게 아니다. 주로 공무원들이 모여 사는 세종에선 윗집 사람도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일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도 참고 산단다. 이곳만의 주말 에티켓도 있다. 가족과 함께 있다가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아는 채를 안 한다는 게 시(市)의 룰이다. 직장 내 본인의 위치나 관계를 가족에게 보여주는 것은 실례라는 암묵적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학부모로서 이웃과 만나는 일도 가급적 피한다. 최근 모 부처 사람이 유치원에 ‘부모의 공무원급에 따른 반을 새롭게 구성해달라’고 제안했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어딘가 남다른 옷차림의 사람을 발견하는 일도 흔치 않다. 심지어 비둘기나 쓰레기를 보기도 어렵다. 세종을 ‘멸균 도시’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이 ‘멸균성’은 모두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비슷한 모습으로 산다는 걸 돌려 말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서로 폐를 끼치지 않는 삶은 처음엔 편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종의 삶을 구내식당 밥처럼 금방 질려 한다. ‘비둘기똥’과 같은 일상의 의외성까지 모두 제거된 이 공간은 시각적 환경마저 단조롭다. 그래서인지 공무원들에게서는 돌아갈 서울행을 기다리는 조바심이 자주 엿보인다.

최근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한 영혼이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을 다룬다. 이 영혼은 멀끔하고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에서 살아갈 의미를 찾는다. 어머니의 잔소리, 이발소에서 얻은 츄파춥스, 연인들의 재잘거림, 먹다 남은 피자 조각 같은 것들이다. 소란스럽고 귀찮기도 한 사람들의 관심이, 일상의 단조로움을 흔들어 놓는 길거리 낙엽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지 않느냐고 영화는 묻는다.

〈소울〉의 주인공처럼 세종의 사소한 일상에서 의외성과 행복을 찾기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람 간의 거리감도, 단조로운 풍경도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 세종인들이 규칙과 반복이 지배하는 삶을 참아가며 완성해놓은 일에서는 어떤 새로움과 의외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삶은 단조롭더라도 이들의 일은 어쨌든 사회를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새로움을 위한 것이니까. 그걸 발견해서 전달하는 게 기자의 일이기도 하고. 세종을 한 해 전에 떠난 선배의 말이 귓전에 오래 남는다. “그래도 거긴 무에서 유를, 사람을 살리는 일을 창조하는 곳이야.”

윤지원 경제부 기자 yjw@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

인기 무료만화

©주간경향 (weekly.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향신문은 한국온라인신문협회(www.kona.or.kr)의 디지털뉴스이용규칙에 따른 저작권을 행사합니다.〉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