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도시재생을 선택한 까닭

입력 2021. 3. 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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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월동 덕화연립 45세대 '내가 살던 곳에서 계속 잘 사는 방법' 찾아
[주간경향]

서울 양천구 신월동 덕화연립 주민의 평균연령은 60세 전후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20년 이상 이곳에 터를 잡고 생계를 이어왔다. 덕화연립이 처음 지어진 1983년에만 해도 이 연립은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강남·서초 어디에 내놔도 남부럽지 않을 다세대주택이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덕화연립은 대규모 재건축 대신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통해 지상 7층짜리 소형 아파트로 단장될 예정이다. / 류인하 기자


1984년 입주한 이후 줄곧 이곳에서 살아온 이준호씨(71)는 지난해 덕화연립 조합장이 됐다. 이 연립에서 가장 큰 평수(45㎡)에 살고 있기도 하고, 가장 오래 거주한 주민이기도 해서다.

동의율 97.8%의 자발적 선택

양천구는 최근 ‘덕화연립 가로주택정비사업 사업시행계획’을 인가·고시했다. 가로주택정비사업이란 노후·불량 건축물이 밀집한 가로(街路)구역에서 종전의 가로를 유지하면서 노후주택을 소규모로 정비해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도시재생사업이다. 도시재생사업 내 일종의 ‘미니 재건축’으로 볼 수 있다. 정비구역 지정이나 추진위원회 구성 등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짧게는 7년에서 10년 이상도 걸리는 재건축에 비해 시행 기간도 짧다.

그러나 이 같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서울 전역에서 가로주택정비사업을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곳을 찾기 어렵다. 무엇보다 돈이 안 된다. 주민들은 최대한 높이 지어 더 많은 이익을 보려 하고, 건설사 역시 큰 아파트를 지어야 이윤이 남는데 소규모 재건축으로 얻을 수 있는 이윤은 제한적이다. 강서구 등촌삼안 1·2주택, 중랑구 면목우성주택, 구로구 칠성아파트, 강남구 현대타운 등 서울 일부 지역에서 가로주택정비사업 완료됐거나 한창 추진 중이지만 덕화연립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주민들 스스로 가로주택정비사업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덕화연립 가로주택정비사업 동의율은 97.8%다. 전체 45세대 중 44세대가 찬성했다. 서울시에 따르면 역대 가로주택정비사업 추진 지역 중 가장 높은 동의를 받아냈다.

정비사업으로 기존 3개동 지상 3층짜리 45세대 연립주택은 오는 2024년 초 지하 2층~지상 7층의 ㄷ자 모양 ‘나 홀로 아파트’로 완공될 예정이다. 총 70세대가 입주하게 된다. 기존 45세대를 제외한 25세대는 일반분양으로 공급된다. 올해부터 가로주택정비사업 고도제한이 완화돼 더 높게 지을 수도 있지만, 주민들은 원래 정해진 7층 높이까지만 짓기로 합의했다.

재건축이 곧 돈인 세상에 이곳 주민들은 왜 가로주택정비사업을 택했을까. 물론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다는 한계도 있었다. 신월동은 비행기가 낮게 지나는 곳이라 용적률 제한이 있다. 건폐율을 높일 만큼 부지가 넓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주민들 스스로 “내가 살던 집으로 큰 이윤을 남기려 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했다는 데 있다. 이곳 주민들은 한결같이 “내가 어차피 다시 들어와 살 집인데 좀 더 깨끗하고 넓게 살고 싶다는 욕심만 있을 뿐 더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합장 이준호씨는 “구청에서는 고도제한 완화로 10층까지도 지을 수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것(조건)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재건축되는 덕화연립 조감도 및 배치도. / 양천구 제공


오랫동안 정든 이웃사촌들

늘 얼굴을 마주보며 살던 사람들이라 설득작업도 비교적 쉽게 끝났다. 3개동 중 20평대로 비교적 넓은 가·나 2개동 주민 27세대 가운데 24세대가 10년 이상 장기거주자들이다. 이곳 주민 95%는 준공 후 다시 돌아와 살 예정이다. 이번 가로주택정비사업으로 주민 1세대당 부담하게 되는 자기분담금은 평균 6000만~7000만원이다. 주민들은 “이 보다 더 저렴하게 새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2월 23일 찾은 덕화연립 앞은 마을 주민들로 북적였다. 컨테이너 임시 부스 안에는 이주지원 신청을 하는 주민들로 가득 찼다. 절반 이상이 임시로 머물 집 계약을 마쳤고, 일부는 이미 집을 비운 상태다. 조합장 이준호씨는 “4월 30일쯤이면 이곳 주민들 대부분이 인근 집으로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 역시 조만간 인근으로 집을 옮길 예정이다. 이주작업이 모두 마무리되면 덕화연립은 철거 및 땅파기 작업에 들어간다. 지상에 나란히 병렬주차를 해야 했던 주차문제도 지하 2층 주차장이 조성되면 말끔히 해결될 예정이다. 주민휴식공간 하나 없던 연립 안에는 경로당, 작은도서관, 주민공동 휴게실 등이 조성된다.

도시재생사업은 2015년 7월 1일 도시재생법이 제정·공포돼 시행에 들어간 이후에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다.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뉴타운과 대척점에 있는 사업, 재건축을 막는 사업, 낡은 단독주택에 벽화나 그리는 사업 정도로 치부되기도 한다. 도시재생사업 스스로 편견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도시는 필연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다. 쇠퇴해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방법에 재건축·재개발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도시를 살리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각종 뉴타운 사업을 통해 이미 학습했다. 물론 아파트가 곧 부의 척도고, 자산이고, ‘벼락거지’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으로 치부되는 지금 상황에서 도시재생이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기도 어렵다. 다만 고민은 해볼 수 있다. 좀 덜 얻더라도 내가 살던 곳에 꾸준히 ‘잘 살아가는 방법’에 도시재생이 답이 될 수도 있다. 덕화연립 사람들은 도시재생사업을 선택했다.

“사람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도시재생 필요”

김수영 양천구청장
서울 양천구는 재건축과 도시재생이 동시에 활발히 진행 중인 곳 중 하나다. 목동에서는 대규모 아파트단지들을 중심으로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고, 일부 단지는 안전진단평가를 마쳤다. 김포공항 인근 신월동은 도시재생사업이 한창이다. 이곳은 항공기 소음피해로 알려진 곳이다. 비행기 직하지역을 제외하면 소음피해가 크지 않은 곳도 있지만, 비행기 고도제한으로 아파트 재건축 시 층수제한이 있다. 애초에 재건축으로 주민에게 큰 부를 가져다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2월 23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재건축이 어려운 지역은 도시재생을 통한 지역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월동은 고도제한으로 건물을 높이 지을 수 없어 재개발·재건축 계획이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어차피 재건축·재개발이 어렵다면 도시재생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고요. 약 4년간 주민들과 협의를 해 도시재생으로 마음이 모여 현재 신월동 도시재생 역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구청장은 “집이 오래됐다는 이유로 무조건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니듯 도시재생 역시 사람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구청장은 “낡은 집에 벽화를 그리는 식의 도시재생보다는 계속 거주할 수 있는 집은 수리 등 지원을 해나가고, 작은 규모로 재건축이 가능한 곳은 재건축을 지원하는 방식의 다양한 도시재생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류인하 전국사회부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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