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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낚시의 추억

입력 2021. 03. 04.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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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도 더 된 일이다.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여학생 사진을 둘러싸고 오보를 낸 적이 있다.

익명의 인터넷 바다를 누비며 기사를 쓰는 일은 그야말로 '낚시'(인터넷상에서 남을 속이는 일)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글쓴이와 접촉하고 주장을 꼼꼼히 검토했다고 여겼는데 오보로 판명된 일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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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10년도 더 된 일이다.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한 여학생 사진을 둘러싸고 오보를 낸 적이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짤방’(글 잘림 방지)용으로 곧잘 사용되던 사진이었다. 여학생의 엄마라는 사람이 한 유명 커뮤니티 운영진에게 ‘내 딸이 아플 때 찍은 사진이다. 딸이 괴로워하니 도와 달라’는 내용의 글을 보내면서 화제가 됐다. 해당 커뮤니티는 팝업 공지를 띄워 회원들에게 문제의 사진을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모친의 호소가 얼마나 절절했는지 운영진은 ‘공지 이후에도 쓰면 법적 처벌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 공지를 토대로 기사를 썼다. 그런데 아뿔싸! 엄마의 글이 거짓이었다. 기사가 나가고 몇 시간 뒤 운영진이 전화로 알려왔다.

“기자님, 우리 낚였어요. 엄마라던 자가 우리도 기자님도 낚았다고 다른 커뮤니티에 인증 글을 올렸답니다.” 서둘러 기사를 삭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인터넷 곳곳에서 ‘기자가 낚였네’라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이메일로 ‘너도 기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낚여서 죄송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오보를 내게 된 경위를 밝혀야 했다.

돌이켜 보니 난 참 많이도 낚였다. 익명의 인터넷 바다를 누비며 기사를 쓰는 일은 그야말로 ‘낚시’(인터넷상에서 남을 속이는 일)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기고 지는 일이 병가의 상사이니 인터넷에서 낚이지 않은 자 어디 있으리오’라며 위로를 건네는 선후배가 있었지만 신뢰받지 못할 기사를 전송한 죄책감은 두고두고 짐이 됐다.

낚시에 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글쓴이와 접촉하고 주장을 꼼꼼히 검토했다고 여겼는데 오보로 판명된 일이 적지 않았다. 성추행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동생의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나선 친형과 인터뷰해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철도경찰의 채증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고 뉴턴 가속도의 법칙(F=ma)과 현악기 연주자의 손놀림 습관까지 제시한 친형의 주장은 그럴싸했다. 기사에 1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친형은 방송사 인터뷰를 거절했다. 급기야 ‘제가 잘못 안 것 같다’며 돌연 동생의 범행을 인정했다. 기사는 그렇게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학교폭력 미투 파문이 전방위로 퍼지고 있다. 여자배구에서 시작돼 야구와 농구, 축구, 양궁, 복싱 등 스포츠계는 물론 연예계까지 논란이 번지고 있다. 최근 한 달간 가해자로 지목돼 실명이 공개된 사람만 20명이 훌쩍 넘는다. 그런데 근거 없는 낚시성 주장이 이어지면서 미투 운동의 본질이 퇴색된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배우 조병규와 가수 현아, 이달의 소녀 츄, BLACKPINK(블랙핑크)의 제니, ITZY(있지)의 리아 등은 거짓 학폭 폭로로 몸살을 앓았다. 축구선수 기성용 또한 성폭행 논란에 휘말렸으나 피해자들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를 보고 있으니 숱하게 낚였던 내 부끄러운 과거가 오버랩됐다.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은 무고한 사람 한 명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 범죄자 10명을 풀어주는 게 낫다고 했다. 3년 전부터 본격화된 우리 미투 운동은 그러나 인터넷에서만큼은 ‘유죄 추정’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미투 가해자로 거론된 유명인은 해명의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뭇매를 맞았다. ‘아니면 말고’식 폭로에 피로해진 탓일까. 미투를 대하는 네티즌들의 변화는 눈여겨볼 만하다. 예전엔 폭주 기관차처럼 비난의 급발진을 했다면 이제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기어를 중립에 놓겠다는 반응이 부쩍 늘었다.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진실 규명 또한 중요하다는 걸 함께 체득한 것 같아 다행이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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