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는 왜 넘어지지 않을까

한겨레21 입력 2021. 3. 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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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배운 생물학, 몸으로 겪은 생물학]임신부 몸에 나타나는 변화들.. 복직근 분리, 임신 기간 28도까지 굽는 요추
군터 폰 하겐스가 만든 플라스티네이션 전시물. https://anatomypubs.onlinelibrary.wiley.com

벌써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인기 있던 ‘인체의 신비전’이 열리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인간의 주검을 썩지 않게 보존하는 플라스티네이션 공법으로 처리해, 보통의 경우라면 절대 볼 수 없는 인체 내부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여서 꽤 인기를 끌었던 전시입니다.

전시장 안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자신의 벗겨진 피부를 들고 있는 남자, 일명 ‘스킨맨’(Skin Man)이었습니다. 16세기에 발간된 후안 발베르데 데 아무스코의 해부학책에 실린 유명한 삽화를 그대로 본떠 만든 스킨맨의 모습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많은 이가 자신의 피부를 옷처럼 들고 있는 스킨맨의 모습에서, 그 피부색이나 겉모습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 한 꺼풀 벗겨내면 모두 다 같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읽어냅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의 스킨맨은 손에 든 피부가 아니라, 그의 복근으로 더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당시 임신 중이어서였을까요. 하루가 다르게 나오던 제 배와 스킨맨의 납작하고 단단한 복근의 차이가 너무 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keleya.de
복직근 이개(분리)의 출산 전(위)과 후. getactivephysio.com.au

불러오는 배, 이러다간 찢어지지 않을까

흔히 사람들은 만삭 임신부에게 ‘배가 남산만 하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임신 막바지가 다가올수록 정말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와서, 이러다 피부가 찢어지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러다 스킨맨을 접하자 문득 생각이 피부밑 근육조직에 닿았습니다.

사진(57쪽 왼쪽 사진)에서도 보이듯이, 사람의 장기는 바깥부터 차례로 피부와 근육과 복막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기는 그 복막 안쪽에 위치한 자궁의 안쪽에 들어 있고요. 그러니 아기가 배 속에서 자라나면 자궁과 피부뿐 아니라, 그 아래 근육층도 그에 맞춰 늘어나야 합니다. 원래 늘어나는 용도로 진화된 자궁과 상당히 신장력 있는 피부는 그렇다 쳐도, 근육은 그리 쉽게 늘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근육이 수축과 이완으로 신체 운동을 조절할 수 있다지만, 이때의 이완이란 어디까지나 수축됐던 근육이 원래 길이만큼 회복된다는 뜻이지, 외부 압력으로 정도를 넘어 늘어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불러오는 배의 크기는 복근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곧 넘을 듯 보였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배를 내려다보는데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배 모양이 뭔가 이상했거든요. 흔히 생각하듯 흥부네 지붕에 열린 박처럼 둥그런 모양이 아니라, 마치 배 가운데 산맥이 솟아난 모양이었거든요. 이 이상한 복부 모양은, 태아의 성장에 맞춰 늘어나는 압력에 견디기 위해 임신부 복근에서 일어나는 ‘복직근 분리’(Diastasis Rectus Abdominus) 현상이었습니다.

흔히 잘 발달한 복근을 ‘식스팩’ 혹은 ‘초콜릿 복근’이라고 합니다. 복근은 배꼽을 기준으로 위쪽에 양쪽으로 나뉘어 뭉쳐 있어 복부 지방이 없고 근육이 잘 발달한 경우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거든요. 이때 이 근육을 중앙에서 붙잡는 백선(Linea Alba) 조직은 위쪽으로는 흉골 밑부터 아래쪽으로는 치골 상단까지 이어지며 배를 단단하게 잡고 있습니다. 임신이 진행되면서 이 부위가 느슨해지고 복근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복직근 분리입니다.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배에 근육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복근 사이에 세로로 긴 틈이 생겨나고 복근에 걸리는 압력이 줄어 아이가 자랄 공간을 확보하고 엄마의 근육 손상 위험도 낮아지지요.

만삭 임신부에게는 거의 100% 복직근 분리 현상이 나타납니다. 복직근 분리는 아프지 않기에, 대부분의 임신부는 자신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저처럼 문득 배 모양을 보고 깨닫게 됩니다. 복직근 분리 현상은 태아의 성장과 임신부의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모체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진화적 적응입니다.

인간 영장류에게만 있는 남녀차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로봇을 만들고 세웁니다. 그리고 로봇의 배 부분에 전체 로봇 무게의 15~20%를 덧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로봇은 바로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혹은 가만 서 있을 때는 다리를 벌려 어찌어찌 균형을 잡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움직이는 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직립보행을 하는 경우 균형 잡기란 쉽지 않기에 갑작스럽게 몸의 특정 부위에 과도하게 하중이 걸리면 중심을 잡기 영 여의치 않게 되거든요. 하지만 대부분의 임신부는 속도가 좀 느려지고, 허리에 손을 받치고, 좀 뒤뚱거리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대개는 출산 직전까지 걷는 데 큰 무리가 없고 생각만큼 잘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이를 밝힌 흥미로운 논문이 있습니다. 2007년 발표된 ‘이족보행을 하는 호미닌에게서 나타나는 태아 부담과 요추전만증의 진화’(Fetal Load and the Evolution of Lumbar Lordosis in Bipedal Hominins)라는 논문에서 세 연구자는 만삭의 임신부가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혀냅니다. 어떤 대상이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무게중심이 대상의 중앙에서 지면과 수직선상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영장류 사촌들은 그런 점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들은 네 발로 움직이기에 임신 기간 배가 나오는 방향이 중력 방향이므로 무게중심에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요추는 곧은 편이며, 암수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논문 ‘Fetal load and the evolution of lumbar lordosis in bipedal hominins’ media.springernature.com

여성 요추는 사다리꼴, 남성은 직사각형

사람은 다릅니다. 두 발로 걷는 사람은 보통의 자세에서 배만 나오면 무게중심이 몸 앞쪽으로 쏠려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임신부는 몸 밖으로 빠져나간 무게중심을 몸 안쪽으로 다시 가져오기 위해 특유의 자세를 취합니다. 바로 허리와 엉덩이를 뒤로 내밀어 몸의 균형점을 뒤쪽으로 이동시키는 거죠. 이 논문에 따르면, 보통 임신부의 허리는 임신 기간에 18~28°까지 구부러집니다. 여성의 요추 특성으로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목뼈부터 꼬리뼈까지 사람 척추를 이루는 뼈 33개 가운데 허리 부분에 있는 뼈가 바로 요추입니다.

요추는 총 5개의 뼈로 이뤄졌는데, 남자와 여자의 요추 형태와 특성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남자 요추가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라면 여성 요추는 등쪽 면이 더 좁은 사다리꼴 모양입니다. 알다시피, 척추를 구성하는 뼈와 뼈 사이에 흔히 디스크(추간판)라고 불리는 질긴 섬유질로 둘러싸인 젤리 같은 조직이 있어 뼈를 연결하고 충격을 완화합니다. 따라서 남성처럼 요추가 직사각형 모양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허리를 뒤로 꺾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여성은 애초부터 뼈 모양이 사다리꼴에 가까워서 요추를 뒤로 기울이기가 더 쉽습니다. 또한 남성은 5개 요추 중 아래쪽 2개만 뒤로 구부러지는 것이 가능한데, 여성은 아래쪽 3개가 가능하므로 더 수월하게 요추를 굽혀서 척추를 S자로 만들어 무게중심이 몸 안에 있도록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조 때문에 혹시나 과학이 발전해 지금의 여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남성이 임신할 수 있게 된다면 이들은 심각한 요통에 보행 불편을 겪을 가능성이 크지요. 마찬가지로 영장류가 당장에 이족보행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적어도 암컷은 임신 기간만큼은 사족보행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체의 놀라운 복원력

아기를 낳자 팽팽하게 부풀었던 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물렁물렁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런데 배꼽을 중심으로 임신선을 따라 세로로 깊이 주름이 생기는 것을 보고 살짝 당황했습니다. 배에 생기는 주름은 늘 가로로만 생기는 줄 알았는데 세로 주름이라니요. 이 역시 분리된 복직근이 아직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해 그 틈으로 늘어났던 피부조직이 접혀 생기는 현상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복직근 분리는 출산 뒤 6개월 이내에 대부분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하고, 시간이 지나자 세로로 깊이 생겼던 주름도 사라졌지만, 처음 몇 달은 좀 심란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를 낳고 몸이 변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인체 복원력은 꽤나 놀라워서 시간이 지나니 분리됐던 근육도 다시 달라붙고, 늘어졌던 피부도 다시 돌아가더군요. 이 모든 것 역시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답니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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