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발효 60일 미풍일까 광풍일까] 세계사적 대전환.. 美·中 양강 국제 질서 재편 계기 될까

김문관 기자 입력 2021. 3. 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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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럽과 함께하지만, 그 일부는 아니다(We are with Europe, but not of it).”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후 한 말이다. 처칠은 1946년 스위스에서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도 유럽합중국의 중심과는 거리를 뒀다.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大英帝國)을 건설했던 영국의 자존심이 엿보이는 일화다.

전후(戰後) 들어선 영국 노동당 정권은 이런 노선을 따랐다. 영국은 1951년 유럽석탄철강 공동체(ECSC) 출범으로 막 첫발을 뗀 유럽 통합 운동과 거리를 뒀다.

유럽과 거리를 두던 영국은 ECSC를 기반으로 1967년 설립된 유럽공동체(EC)에 1973년이 돼서야 가입했다. 그러나 가입 2년 후인 1975년, EC 탈퇴 국민투표에 들어갔다. 결과는 부결. 역사가 휴고 영은 “당시 논란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라며 “EC 탈퇴 주장 진영은 영국인에게 유럽 바깥에서 살아남는 것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했다”라고 저술했다.

이어 1975년 보수당 당수가 된 마거릿 대처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 총리직을 맡았다. 대처는 EC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영국이 EC에 내는 분담금에 대한 지속적인 환급을 요구했다. 대처의 뒤를 이은 존 메이저 총리도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EC를 전신으로 한 유럽연합(EU)이 27개국의 참여로 출범했다. 그러나 메이저 총리는 유럽 단일통화(유로화)와 노동자 권리를 보호하는 새로운 사회 헌장에 참여하지 않는 등 삐걱거리는 관계를 지속했다. 1997년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총리가 되면서 사회 헌장에 참여하기로 하는 등 영국과 EU 관계는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영국의 단일통화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는 공약으로만 그쳤다. 영국은 한 번도 파운드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달러화 이전 글로벌 기축통화 역할을 했던 파운드화에 대한 자존심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10년 보수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당내의 반(反)EU 의원들과 갈등을 빚었다. 영국은 유럽의회의 중도 우익 성향인 유럽국민당(EPP) 그룹에서 탈퇴했고 처음으로 EU의 새로운 조약을 봉쇄했다. 이것이 바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도화선이 됐다. 영국 내부적으로는 영국독립당(UKIP)이 부상했다. 보수당은 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5년 5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캐머런은 공약대로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2016년 6월 23일(현지시각)에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2015년 초반까지만 해도 브렉시트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유럽 난민 사태와 유로존 위기로 브렉시트 찬성론이 기세를 얻었다. 결국 투표에 참여한 영국 국민 3355만 명 중 51.9%인 1742만 명이 브렉시트 찬성에 표를 던지면서 브렉시트가 결정됐다. 영국의 EC 가입 후 브렉시트 결정까지 43년이 걸린 셈이다. 이어 영국과 EU의 협상을 거쳐 올해 1월 1일 브렉시트가 발효했다.

경제학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브렉시트는 세계사적 대전환”이라고 평하고 “과거에 가졌던 탈(脫)유럽에 대한 두려움보다 신자유시대를 거치며 누적된 영국인의 불만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브렉시트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자명하다. 세계를 지배했던 제국주의 영국은 2020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5위의 강대국이다. 아울러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임과 동시에 문화적으로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브렉시트는 세계 패권 지형도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체제가 계속 자리 잡을 것인가, 아니면 신고립주의에 근거한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 것인가가 관심사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의 ‘아시아 회귀 정책(pivot to Asia)’은 유럽의 안정을 전제로 중국 패권의 부상을 견제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유럽의 분열을 틈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사건 등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다시 유럽에 신경을 써야 하는 상황은 동북아 국제정세에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가장 먼저 참여했던 사례처럼 중국과의 경제협력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할 수도 있다. 이런 영·중 관계 변화도 한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수출입은행에 따르면, 2019년 말 기준 영국의 대(對)한국 투자 누적 총액(신고 기준)은 188억달러(약 21조1000억원)로 EU 내에서 네덜란드에 이어 2위다. 같은 시점 한국의 대영국 투자 누적 총액은 214억달러(약 24조원)로 EU 내에서 가장 많다. 브렉시트는 한국이 이 같은 직접적인 경제 이해뿐 아니라 브렉시트 이후 새로운 세계 질서 등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아직 모든 시계는 불투명하고 가정일 뿐이다.

2021년 1월 1일 브렉시트 발효 후 한적한 영국 도버항. 사진 블룸버그

브렉시트, 미풍일까 광풍일까

영국은 지난해부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실패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소셜미디어(SNS)에 백신 접종 현황을 공개하는 등 사태 수습에 발 벗고 나섰다. 브렉시트 여파보다 코로나19 대책에 부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브렉시트로 인한 경제·산업계 피해가 조금씩 생기고 있는 중이다. 앞서 영국 재무부는 브렉시트가 현실화하면 2년간 파운드화 가치가 12% 폭락하고, 국내총생산이 3.6%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공공부채는 240억파운드(약 37조600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봤다. 코로나19 사태가 끓는 물에 기름을 부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 경영진의 4분의 3 이상이 브렉시트 투표로 인해 본사 또는 영업망의 일부를 영국 밖에 배치하는 사안을 고려 중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글로벌 컨설팅 회사 KPMG가 영국 경영진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는 본사 또는 영업지점을 해외로 옮기는 것을 고려 중이라고 답했다. 조사 대상은 연 매출 1억~10억파운드(약 1600억~1조6000억원), 고용 인원 500명 이상인 영국 기업이었다.

글로벌 금융허브(금융 중심지) 런던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런던은 제삼 세계 달러화 공급의 축이며 미국과 유럽 금융시장의 완충지대 겸 창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로 인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이 새로운 금융허브로 떠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 정부는 금융허브 위상이 흔들리자 글로벌 상장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개혁에 나섰다. 특히 핀테크(fintech·금융과 기술의 합성어) 규제 완화를 통한 디지털 금융 빅뱅 구상도 나오고 있다.

EU와 결별한 영국은 이제 막 돛을 올리고 망망대해로 항해를 나선 거대한 배와 같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브렉시트와 영국호(號)에 다시 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이다. 브렉시트는 과연 미풍에 그칠까, 아니면 광풍으로 번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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