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질'만 난무하던 여의도를 제 발로 떠난 표창원의 '고해성사'
책은 ‘고해성사’다. 평생 정치와는 담 쌓고 살아온 경찰관 출신의 교수이자 범죄 심리 분석 전문가였던 표창원은 20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야당, 여당 의원으로 4년 임기를 다 채우고 미련 없이 여의도를 제 발로 떠났다. 21대 선거에 불출마한 직접적인 이유는,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조국 사태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속한 당이 여당이 되면서 바로 직전 야당 시절 내가 직접 비판하고 공격하던 것과 유사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역할을 해야 하는 자괴감만큼은 견디기 어려웠다”고 다시 한번 쐐기를 박는다. ‘내로남불’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만큼 그의 얼굴은 두껍지 못했다. 촛불이 만들어낸 정부이기에 더 견디기 어려웠다. “고객들이 믿고 예탁한 거액의 돈을 날려버린 증권사 펀드매니저의 심경이랄까.”(16쪽)
‘아직 정치를 몰라서 저런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래도 안에서 바꿔야지’ 닳고 닳은 정치인들의 비웃음과 훈수를 뒤로하고 그는 한 명의 시민으로 돌아왔다. 여의도에서의 4년은 범죄 분석 전문가인 그에게 일종의 ‘잠입수사’였다. 책은 범죄 현장을 샅샅이 파헤치듯 여의도의 속살을 까뒤집어 놓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미스터리. 그래도 나름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왜 여의도에만 모아 놓으면 ‘무능의 극치’를 달리는 걸까. 투입되는 인력과 자원, 행사할 수 있는 권한, 권력에 비해 국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생산성이 떨어지는 조직이다. 농땡이를 피우는 건 아니다. 직접 해봤더니, 바빠도 너무 바빴단다. "본업인 의정활동을 후순위로 밀어놓을 만큼, ‘다른 일’로 바쁜 게 문제"지만. 지역구 활동이 대표적이다.
지역 주민들 눈도장 찍는 게 왜 나쁘냐는 항변이 벌써부터 들리지만, 저자는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 위한 “사전 선거운동 아니냐"라고 한마디로 일축한다. 지역 유력 인사들을 만나 ‘조직’을 닦느라 상임위 일정을 내팽개치는 건, 민의의 대표자가 아니라 4년 뒤 본인의 ‘재취업’을 위한 구직 활동이란 내부자의 돌직구에서 자유로울 정치인은 없어 보인다.
한 끗 차이로 '로비'가 될 수 있는 각계 유력인사들과의 만남도 '불필요한 바쁨'의 한 원인이다. 헌법과 국민보다 당론과 당의 권력자 ‘실세’에 충성해야 하는 여의도의 문법도, 민의의 대리인 역할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하나라고 저자는 꼬집는다.
결국 국민과 민생을 제쳐두고 여의도에 남는 건 권력욕이다. 4년 뒤 한 번 더 배지를 달기 위해, 이왕이면 여당 의원으로 더 떵떵거리기 위해, 여의도는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상설 전투장'이 되곤 한다. ‘정치 전쟁’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무기는, ‘내 편은 무조건 감싸고, 네 편은 무조건 때린다’는 진영 논리다.
‘순진하게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저쪽이 권력을 잡았을 땐 더했다’ ‘우리는 그러니까 억울하다’는 집단의식의 흐름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저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얹는다. ‘날 도와주지 않으면 다음에 당신이 당할 수 있다’는 협박에 대다수 국회의원들이 ‘진영 방패’ 뒤에 숨게 된다는 거다. 강성 지지층까지 합세하면 이견은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공동운명체가 된다.
무엇이 정의인지, 상식인지, 공정인지, 사실인지, 거짓인지, 옳고 그른지 따지고 노선을 정하는 ‘성실한 정의’는 사치가 돼버린다. 내 편은 무조건 믿고 보는 ‘게으른 정의’만이 남을 뿐이다. 이건 보수고 진보고 가리지 않는 여의도의 ‘국룰’이다. 책 곳곳에는 ‘게으른 정의’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당과 문재인 정부를 향한 쓴소리가 툭툭 튀어나온다.
4년간의 여의도 생활에서 저자가 목격한 건, ‘정치’보다는 ‘정치질’이었다. 사적 이익에 눈먼 국회의원들, 집권 욕심만 앞선 정당들의 정치 전쟁 속에 국민을, 민생을 돌보겠다는 정치의 본령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여의도에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서 저자는 정치인들의 ‘순수한’ 초심, 국민들의 꾸준한 감시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원론적이지만 그래서 더 절실한 당부로 책을 마무리짓는다.
당장 7일로 다가온 서울·부산 재보궐 선거에서부터 국민들은 민심의 명령에 따라 정치권을 준엄하게 심판할 거다. 궁금한 건, 책을 본 300명 의원님들의 반응이다. ‘정치는 원래 그런 것’이라고 또 한번 코웃음 치는 거 아닌지 걱정이다. 결국 ‘진짜 정치는 이런 것’이라고 깨우쳐주는 건 다시 국민의 몫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참 할 일이 많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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