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조' 최명희가 묻는다, 우리에게 '악녀'는 무엇이었나

김지혜 기자 2021. 4. 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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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tvN 드라마 <빈센조>의 여성 악역 최명희(컬러 사진)는 지금껏 매혹적인 외모와 표독스러운 성격만을 강조했던 <SKY캐슬> 김주영, <천국의 계단> 한유리, <왔다! 장보리> 연민정, <펜트하우스> 천서진, (오른쪽 위 흑백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등 드라마 속 ‘악녀의 계보’를 비껴간다. tvN·JTBC·MBC·SBS 제공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악남’은 없는데 ‘악녀’는 있다. 성별 고정관념의 산물인 ‘악녀’는 단순한 개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드라마·영화 속 여성 악역은 줄곧 ‘악녀’로 호칭되며 ‘악녀다운’ 고정된 외양과 정해진 습성을 반복해왔다. 짙은 화장(립스틱은 붉으면 붉을수록 좋다)에 매혹적인 외모, 부족한 실력을 만회하려 벌이는 갖은 계략과 속임수, 그리고 그의 ‘악함’의 원인이 된 가족 혹은 연인에 대한 비틀린 욕망. 뻔하디뻔한 악녀의 클리셰는 2021년 현재에도 건재하다.

예컨대 방영 중인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천서진(김소연)과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2000)에서 같은 배우가 연기한 허영미는 21년의 시간적 간격이 무색하게도 ‘악녀의 클리셰’ 관점에서 볼 때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두 인물 사이를 채우는 SBS 드라마 <천국의 계단>(2004)의 한유리(김태희), MBC 드라마 <왔다! 장보리>(2014)의 연민정(이유리) 등 잘 알려진 악녀의 계보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2019년 JTBC 드라마 <SKY캐슬>의 김주영(김서형)은 악의 동기도 목적도 없는 사이코패스처럼 보이던 극 초반의 신선한 전개를 뒤집고 후반부 딸과 남편에 얽힌 가정사가 드러나면서 결국 악녀 공통의 수사 “표독스러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성 악역에게는 결코 붙지 않는 수식어, 악녀의 ‘표독’이 짙어질수록 그의 파멸이 주는 극의 카타르시스는 극대화된다. ‘악녀’를 내세운 서사들이 보여준 자극적인 재미는, 결국 여성 악인에게 뒤집어씌운 부당한 고정관념에 적지 않게 기대고 있던 셈이다.

방영 중인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의 천서진(김소연)과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2000)에서 같은 배우가 연기한 허영미는 21년의 시간적 간격이 무색하게도 ‘악녀의 클리셰’ 관점에서 볼 때 별로 다를 것이 없다. MBC 제공


“이 샤발라들아!”

tvN 드라마 <빈센조>의 최명희(김여진)는 다르다. ‘샤발라’라는 정체불명의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시끄러운 경상도 사투리, 평범하고 검소한 차림새의 그는 외양부터 예의 ‘매혹적인 악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극중 남동부지검 특수부 에이스 검사인 그는 한때 조직 수뇌부의 ‘사냥개’였고, 지금은 법무법인 우상의 최고 시니어 변호사로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거짓 누명을 씌우고 살인을 사주하는 반박 불가의 ‘악인’이다.

최명희는 예쁘지도, 어리지도, 표독스럽지도 않다. 가족이나 연인에게서 비롯한 감정적 결핍도 없으며, 거짓된 계략보다는, 대체로 비도덕적이지만 자신만의 능력과 방법으로 움직인다. <빈센조>는 이런 여성 역시 충분히 ‘악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최명희가 최근 방영된 드라마로서는 드물게 ‘기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고정관념을 온몸으로 체현한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빨래방이든 사무실이든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좋아하는 줌바 댄스를 즐겨 추는 뻔뻔한 성격, 맨얼굴에 질끈 묶은 곱슬머리와 같은 수더분한 외모 등 그는 소위 ‘아줌마’라고 말해지던 여성혐오적 전형성을 갖고서도 충분히, 아니 심각하게 ‘악하다’. <빈센조>는 그렇게 악녀와 아줌마, 이중의 성별 고정관념을 비틀고 새로운 형상의 ‘여성 악역’을 탄생시킨다.

때때로 최명희의 모습은 그간 드라마·영화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남성 악역의 전형과 닮아 있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부하 직원들에게 장기자랑을 강요한다거나, 자리 분위기가 어찌 됐든 생선 눈알이 몸에 좋다며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막무가내 ‘꼰대’지만 자신이 충성해야 할 권력자에겐 군말 없이 90도로 허리를 굽힌다. 극중 상명하복식 군대문화와 ‘핏줄 승계’로 이루어진 바벨그룹이라는 한국식 ‘악의 축’에 맞서 싸우는 것은 비단 이탈리아식 ‘악인’ 마피아 변호사 빈센조(송중기)뿐이 아니다. ‘아줌마’의 모습으로 온통 남성으로만 채워져 온 한국식 ‘악의 세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비고 다니는 최명희의 모습을 통해 <빈센조>는 그간 지겹게 반복돼 온 악에 대한 서사적 전형성을 타파해버린다.

때때로 최명희의 모습은 그간 드라마·영화 속에서 숱하게 등장해왔던 남성 악역의 전형과 닮아 있기도 하다. tvN 캡처


최명희의 등장과 <빈센조>의 인기는 그동안 고정관념에 기반해 여성 인물을 평면적으로 ‘찍어내던’ 극의 문법을 깨뜨리는 것 역시 대중을 사로잡는 ‘신선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물론 최명희라는 비전형적 ‘악녀’의 탄생이 악녀의 계보를 다시 쓸지, 혹은 그 계보를 비껴가는 이례적 사례로 그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를 통해 국내 54개 매체의 기사를 분석한 결과 지난 1월부터 4월1일까지 <펜트하우스> 천서진 역을 맡은 배우 김소연과 ‘악녀’라는 단어가 함께 언급된 기사는 283건에 달했으나, 최명희 역의 배우 김여진의 경우 단 1건에 불과했다. 반면 김여진과 ‘빌런’(악당)을 함께 언급한 기사는 131건에 달했다. 김소연의 경우에도 41건의 ‘빌런’ 언급 기사가 있었으나, 모두 주단태 역의 엄기준과 엮여 ‘빌런 커플’로 언급될 때뿐이었다. 대중은 왜 여성 악역인 최명희를, 김여진을 ‘악녀’ 아닌 성별 중립적 단어인 ‘빌런’으로 부르기로 택했을까? 천서진과 김소연은 왜 남성 악역 없이는 ‘빌런’이 될 수 없는 걸까? 지금껏 우리에게 ‘악녀’는 무엇이었나 이제 자문해 볼 때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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