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근본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비로소 보인 '미나리'의 감동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⑫]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입력 2021. 4. 8.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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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환원주의와 미래 발전

[경향신문]

작게 쪼개 살피는 게 최선이라며
지금도 수용되는 환원주의 철학선
‘응용’ 과학의 이해와 발전을 위해
근원적 과학이 필요하다 말하지만
반대 방식으로 연구해 성과 내기도

우리는 과학을 흔히 사물의 이치를 ‘근원적’으로 알려고 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와 (나)의 두 가지 학문이 있다고 할 때 어떤 것이 더 근원적인지 비교한 다음 더 근원적으로 보이는 학문을 다른 학문의 뿌리라고 쉽게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농담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화학’ ‘물리학’ ‘수학’이 순서대로 줄을 서서 한마디씩 한다.

1. ‘경제학’에게 ‘심리학’이 말한다. “경제학은 응용심리학이야.”

2. ‘심리학’에게 ‘생물학’이 말한다. “심리학은 응용생물학이야.”

3. ‘생물학’에게 ‘화학’이 말한다. “생물학은 응용화학이야.”

4. ‘화학’에게 ‘물리학’이 말한다. “화학은 응용물리학이야.”

5. 멀리 떨어져 있는 ‘수학’이 모두에게 소리지른다. “이봐들! 내 말 들려?”

비록 농담이긴 하지만, 이처럼 학문들을 ‘근원’과 ‘응용’으로 나누고 줄을 세우려는 시도는 연구 대상을 지속적으로 더 작은 부분으로 쪼개어 나가면서 그 부분들을 더 세세히 살피는 것이야말로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최선의 과학적 방법이라는 환원주의 철학(reductionist philosophy)에 기인하고 있으며, 지금도 꽤 많은 과학자들이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다.

인체 속의 세포에서부터 경제·사회적 현상 그리고 거대한 은하계까지 거의 모든 과학의 연구 대상들은 수많은 구성요소(분자, 사람, 행성과 우주 먼지)가 서로 얽히고 상호작용하면서 작동하는 복합계(complex system)임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들을 계속 잘게 쪼개어가면서 탐구해야 한다는 사고는 역사적으로 근대과학이 태동하고 성공하는 데 기여한 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F=ma라는 뉴턴의 운동 방정식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이 식은 m의 질량을 가진 물체에 가해지는 힘 F, 그리고 (x, y, z)로 표시되는 그 물체의 3차원적 위치와 (vx, vy, vz)로 표시되는 3차원적 속도만 알면 그 물체가 미래에 어디에 있을지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다는 ‘물리학의 예언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뉴턴의 방정식을 남들보다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과학 만능의 시대에서 신탁(神託)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인데, 천체역학자인 라플라스(Simon-Pierre Laplace·1749~1827)로 하여금 “지금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위치와 속력을 안다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을 아는 그 존재를 그래서 ‘라플라스의 도깨비(Laplace’s Demon)’라고도 부르며, 갑자기 몰아친 소나기에 아끼는 옷이 흠뻑 젖어 버려야 했거나 난데없이 끼어든 난폭운전 자동차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져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든 미래를 알려줄 수 있는 신탁과 도깨비는 염원하고 숭배하고 싶은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근원적’인 과학이 존재하고 그것을 통해서만 기타 ‘응용’ 과학을 더 잘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믿음은 과학의 발전을 더디게 할 뿐만 아니라 아예 본질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주장이 20세기 말에 나오기 시작했다. 197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필립 W 앤더슨(Philip W. Anderson·1923~2020)이 쓴 ‘많으면 달라진다(More in different)’라는 에세이에 잘 나와 있는데, 고체물리학(solid-state physics) 또는 응집물질물리학(condensed-matter physics)에 큰 족적을 남긴 앤더슨은 이 에세이에서 물리학적 환원주의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자물리학(particle physics·원자보다 작은 소립자들을 연구하는 물리학)의 전문가들이 만물의 ‘근원’을 찾겠다며 원자를 점점 더 작게 쪼개면 쪼갤수록 오히려 그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는 세포, 생명체, 인간 그리고 사회와 같은 거대한 것들을 이해하는 일로부터는 더욱더 멀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원자들이 아주 많이 뭉쳐져 만들어진 세포는 원자 하나하나만을 떼서 볼 때는 관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일종의 본질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 생물이 ‘살아 있다는 것’이나 사람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러한 본질적인 변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심리학이 물리학의 응용(화학)의 응용(생물학)의 응용에 지나지 않았다면, 쿼크와 같은 아주 작은 소립자들을 뭉쳐 사람의 감정을 ‘조립’해내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위의 뉴턴 방정식을 포함해 맥스웰의 전자기 방정식, 슈뢰딩거의 양자역학 방정식 등 자연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기본 방정식(fundamental equations)’을 통해 과학이 자연의 진실을 향해 가고 있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사람의 감정과 욕망’ 같은 것에 대해서는 TV 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Battlestar Galactica)>의 인간·기계 조합체인 ‘하이브리드’가 내뱉는 기괴한 인간언어·기계어 조합보다도 쓸모가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차라리 포크듀오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랫말처럼 지하철 터널벽에서 예지자의 말을 찾고 존재할 수 없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또 다른 부류의 과학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자세로 전문지식과 상식이 결합된(가끔은 아주 기발하게) 현실적인 방식으로 복합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필자가 이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은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 분야의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미국 북동부 보스턴에서 강 북쪽으로는 매사추세츠공대(MIT)와 하버드대 본캠퍼스가 있는 케임브리지가 있고, 강 남쪽으로는 하버드 의과대학을 위시한 많은 병원과 연구시설이 있는 롱우드 지역이 있다. 백신의 원리를 발견한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1895)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길(Pasteur Ave)’ 표지판의 풍경이 인상적인 곳인데, 이 이론물리학자를 진정으로 놀라게 한 것으로는 ‘유전자 제거(노크아웃·gene knock-out)’ 실험이 있었다.

유전자(게놈)는 생명체의 설계도로서 머리부터 발끝 사이 모든 것의 발생과 기능을 결정한다. 곱슬머리, 다섯이라는 손가락의 숫자 또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약 10만개나 되는 인간 유전자 각각의 역할을 알아낸답시고 유전자 단백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운동 방정식을 풀려는 환원주의자들의 시도는 백이면 백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유전자 제거’는 이러한 접근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물체로부터 특정 유전자를 없애버린 다음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함으로써 그 유전자의 역할을 역으로 추적하는 철저히 경험주의적인 방법이다. 균형을 잡게 돕는 유전자가 제거된 채 태어난 생쥐들을 회전하는 봉에 올려놓자 여지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웃어야 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정확한 방정식을 풀어야 진정한 연구인 것처럼 생각해오던 나는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로부터 새로운 약과 치료법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단 하나의 올바른 근원’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사라지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이건 한국영화인가, 미국영화인가”
‘미나리’ 보기 전 근원 따지던 모습
‘맹목적 환원주의’와 왠지 겹쳐 보여
그들·우리의 차이에만 주목했다면
인류 보편적인 감정을 놓쳤을지도

최근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이때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 것은 바로 영화 <미나리>였다. 생뚱맞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미나리>를 보기도 전에 이것은 한국 영화인가, 미국 영화인가, 감독은 한국 사람인가, 미국 사람인가 ‘근원’부터 생각해보려는 내 자신의 모습에서 과학의 막다른 길로 향해가는 맹목적 환원주의가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재외 한인이 제일 많이 살고 있는 미국 이민 역사가 100년을 넘겼고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역사상 최고에 달한 상황이다(미국에 사는 사촌동생은 “요즘 여기 한국 거라면 다 좋아해!”라고 말했다). 정말 어떠한 영화인지 선입견을 억제하고 제대로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 아래 스포일러 주의.

남편을 따라 옛 터전과 해오던 일을 버리고 도착한 낯설고 새로운 땅, 선천적으로 언제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 아이가 걱정되는 아내는 불만으로 가득하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어려운 농장 생활 끝에 아내는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큰 도시로 돌아가야겠다고 하고, 남편은 아이들과 가족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고 말한다. 가족을 위한다는 똑같은 대의명분이 가족의 분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화해 불가의 비극적인 상황이다.

서로의 간극을 확인한 순간 거짓말처럼 아들의 병이 저절로 낫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곧바로 또 안정적인 사업 계약을 맺게 되면서 그들을 괴롭혔던 모든 우려가 일거에 해소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좋은 소식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무의미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들은 이에 대해 기뻐하기는커녕 똑같은 다툼을 반복한다.

그 이후 몇 시간을 달려온 한밤의 귀갓길, 오랫동안 오기를 갖고 길러내던 농작물들이 불에 휩싸여 모두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들을 조금이라도 살려내고자 뛰어든 남편 옆에 어느덧 아내도 들어와 불과 싸우기 시작한다. 말로는 이 모든 것을 버리고 큰 도시로 다시 돌아가겠다며 결별을 선언한 아내였지만 그의 진심은 목숨을 버려서라도 남편과 가족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영화 처음에 나온 ‘서로를 살려주기로 했다’는 약속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미나리>의 내용인데, 둘이 불과 싸우는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오려고 할 뿐 아무리 영화를 곱씹어보아도 이게 한국 사람에 대한 한국 사람의 영화인지, 미국 사람에 대한 미국 사람의 영화인지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은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이삭’보다 ‘Isaac Chung’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감독이 미국에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우리와 다르고,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조건반사는 하마터면 고난과 갈등, 극복이라는 인류보편적인 경험을 그린 빼어난 예술작품을 놓치게 할 뻔한 해악이었을 뿐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결말은 생존과 성공일 수도, 소멸과 실패일 수도 있는데, 이는 모든 새로운 자연조건에서 진화하는 모든 복합계의 공통된 특성이다. 그리고 서로 떨어져 몇 세대가 지나고 나면 옛 터전에 남아 있는 무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이 ‘누가 더 근원적인가’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미래 인류와 문명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네트워크과학·복잡계과학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데이나-파버 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시스템스 생물학을 연구하고,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와 예술의 물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제주도에 현무암 상징물 ‘팡도라네’를 공동 제작·설치했고, 대전시립미술관의 ‘어떻게 볼 것인가: 프로젝트 X’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창시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남는 시간에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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