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의 시시각각] 경이로운 김어준의 정신세계

이현상 입력 2021. 4. 9. 00:52 수정 2021. 4. 9.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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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위해 노골적 편파방송 하다
오세훈 당선되자 '독립방송' 강변
'김어준식 담론' 언제까지 통할까
박영선 전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가 지난 2일 TBS교통방송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뒤 진행자 김어준씨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선 전 후보 페이스북 캡처]

선거 방송에서 기계적 균형은 '사기'일 수 있다. 가령 똑같이 20초짜리 유세 장면을 내보낸다 치자. 한쪽은 청중이 운집한 영상을 쓰고, 한쪽은 빈자리가 듬성듬성한 영상을 쓰는 방법으로 특정 정당 편을 들 수 있다. 방송의 부끄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도 선거 때마다 방송인들이 기계적 균형에 신경 쓰는 것은 다른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제재가 무서워서만은 아니다. "실제 공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공정해 보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판결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선거 이틀 전 5명의 야당 저격 증인의 인터뷰를 아무런 반론 없이 90분 동안 내보낸 TBS의 '뉴스공장'은 편파 방송의 역사를 새로 썼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그 방송의 주인공 김어준씨가 서울시장이 바뀐 날 아침, "TBS는 독립방송이기 때문에 그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범인(凡人)들이 지니는 '염치'쯤은 사뿐히 초월하는 그의 논리가 놀랍다. 방송 독립의 취지가 뭔가. 임명권자나 권력의 이해에 휘둘리지 말라는 뜻 아니었나. 자신을 자리에 앉혔던 전임 시장의 소속 당과 혼연일체가 돼 뛰었던 당사자가 선거에서 지자 독립 운운하며 버틴다. 경이로운 정신세계다.
사실 나는 김씨 스스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으로 봤다. 자신이 '보수의 관용'을 보여주는 들러리가 되는 상황을 거부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진했다. 어쩌겠나. 김어준을 비이성적 진영 담론의 상징으로 남겨 놓는 것도 보수의 중도 외연 전략상 나쁠 건 없다. 진중권씨 말대로 그는 정권의 '엑스맨' 아닌가. 그가 끓이는 생태탕에 여당이 덴 것도 보지 않았나.
설마 그의 자리 보전 의지가 회당 100만~200만원이라는 출연료가 아까워서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혹시 '오세훈의 서울시'에 남아 이른바 '깨시민'을 위한 진지전의 보루가 되겠다는 생각일까. 글쎄, 그런 전략이 통하기는 할까.
최근 김어준이 펼치는 음모론 화법에 지식인과 진보 진영 안에서 비판이 쏟아지는 현상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친문 성향의 시사·정치 유튜브 채널 '최인호 TV'의 운영자가 쓴『김어준이 최순실보다 나쁘다』는 책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 최씨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상당수 시민이 완장을 차고 부대를 만들어 동료 시민들을 겁박하고 세뇌하는 '파쇼적 현상'의 광풍 뒤에 김어준의 실루엣이 어른거리고 있다"고 직격했다. 젊은 커뮤니케이션 학자 김내훈씨는『프로보커터』('도발자'라는 뜻)에서 "아주 무겁게 다뤄야 할 논의를 농담처럼 툭툭 던지면서 입증 책임은 피하되 공론장에 논쟁과 소란을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황우석 줄기세포 바꿔치기설, 2012년 대선 조작설, 세월호 고의 침몰설, 이용수 할머니 배후설 등이 그런 예들이다.
신뢰를 의심받는 김어준을 네거티브 저격수로 내세운 것은 여당의 패착이었다. 김씨가 생태탕 재료를 제공하면 민주당은 열심히 우려냈다. 사실상 여당의 선거대책위원장 역할을 담당한 김씨의 그늘에 '진짜' 선대위원장 이낙연은 묻혀 버렸다. 50년 집권을 꿈꾸는 여당의 지략이 이 정도라면 보수 야당은 아무 걱정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번 재·보궐선거 패배로 여당은 백신을 맞았다. 그 백신이 집권당의 체질 강화로 이어질지, 온몸을 망가뜨리는 사이토카인 폭풍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허황한 음모론 따위나 펼치는 김어준과의 공조가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깨달을 것 같다. 반면에 이명박·박근혜 이후 김어준류 담론에 당하기만 했던 보수는 이제 자신들의 콘텐트로 중도층에 다가가야 하는 도전을 맞게 됐다. 김씨가 진행자 자리를 지키든 아니든, 그가 펼치는 음모론과 궤변의 위력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김어준이 없는 아침, 진보와 보수 진영의 진짜 싸움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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