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위선과 민주주의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입력 2021. 4.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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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또다시 ‘공인’이라는 사람들의 ‘내로남불’로 한국 사회가 뜨겁다. LH로 시작된 국면이 묘하게 흘러 이번엔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인 부동산이 중심 소재다. 어떤 공인은 부동산이 공동체의 불멸과 관련된 가치의 문제라고 역설하며 이 가치를 실현할 법을 제정했다. 그러는 중에 ‘뒤에서 슬쩍’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살짝’ 추구했다. 다른 공인은 부동산이 자본주의 사회에 사적인 이해관계를 실현하는 경제적 재화일 뿐이라며 법 제정에 반대했다. ‘앞에서 대놓고’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왕창’ 추구했다. 둘 다 부동산으로 사적 이해관계를 실현했지만, 한 공인은 도덕적으로 지탄받고 다른 공인은 시샘으로 범벅된 부러움을 받는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왜 그럴까?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사회적 삶은 관객을 두고 벌어지는 자아의 공연이다. 모든 배우는 자신의 자아에 맞는 가면을 쓰고 관객 앞에서 공연한다. ‘연극적 공연’에서는 이 가면이 일상의 현실 자아와 일치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악인의 가면을 쓴 사람이 진짜 악인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적 공연’은 다르다. 가면이 그 뒤에 있는 진짜 자아와 하나 되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는 신분제가 붕괴하고 현대 시민사회가 열리면서 가능해졌다. 자율로 선택하지 않은 사회적 속성 때문에 개인의 삶이 완전히 결정되면 안 된다. 대신 자신이 골라 쓴 가면을 관객 앞에서 얼마나 잘 공연하느냐에 따라 삶의 행로가 정해져야 한다.

사회적 삶이 관객 앞에서 가면을 쓴 공연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누구나 기왕이면 선한 가면을 쓰려고 할 것이다. 선한 가면을 쓴 사람은 그에 걸맞은 ‘외모’와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관객은 배우의 외모와 태도의 ‘일관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장군이 졸병의 외모를 하고 있다든지, 설사 장군의 외모를 하고 있다 해도 정당한 권위를 휘두르는 당당한 태도 대신 비굴하거나 얍삽한 태도를 띠면 관객은 돌아선다. 외모와 태도는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라 사회에 이미 제도로 갖추어진 표준화된 틀이다. 이 틀을 배우와 관객이 공유하기 때문에 사회적 공연이 가능하다. 이 틀의 일관성이 깨지면 사회적 공연은 파탄이 난다. 최근 진보를 자임하는 배우의 일관되지 않은 공연에 관객이 극도로 분노한 이유다.

현대 시민사회에서 사회적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표준화된 틀은 민주주의 대본에서 나온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극렬한 위선 대본이라는 사실. 모든 인간을 평등한 자유인으로 대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선한 요구는 체험된 현실과 맞부딪친다. 경제적 부, 정치적 권력, 사회적 위세는 물론 젠더, 섹슈얼리티, 나이, 몸 등 온갖 사회적 범주에서 인간은 극도로 차등화되어 있다. 이러한 차등은 사회적으로 희소한 자원에 접근하는 데 막강한 힘을 휘둘러 사회를 극심한 불평등 구조로 짜 맞춘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민주주의 대본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배우에게 마치 평등하고 자유로운 것처럼 공연하라고 세차게 요구한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기성 권위에 반항한답시고 악한 가면을 쓰고 위악적인 행위를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행하지 않은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배우 구실을 하며 살고 있다. 둘러보면 세계 어디나 현실의 불평등과 부자유를 옹호하는 반민주적 악은 훨씬 강하다. 이런 악한 현실에서 민주주의 대본을 따라 공연하는 배우는 외모와 태도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유독 어렵다. 그렇다고 배우가 위선적인 공연을 포기하거나 냉소적인 공연으로 돌아서면 안 된다. 더욱 진정성을 갖고 위선 대본을 공연해야 한다. 관객도 위선 배우의 비일관성에 화가 치민다고 위악을 일관되게 저지르는 배우에게 손뼉 치면 안 된다. 홧김에 위악 배우의 공연에 잘못 맞장구치다가는 어느새 그의 악한 대본이 벼락처럼 범 되어 내려온다.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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