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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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적 앞에서 오른손과 왼손이 싸우는 나라

임민혁 기자 입력 2021. 04. 0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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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존망 달린 안보 문제서 정쟁으로 매번 나라가 두쪽
국력 모아 北 대응한 적 없어.. '머저리' '바보' 조롱 언제까지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한국공동사진기자단

최근 한국은행 추산에 따르면 남북 경제력은 45배쯤 차이가 난다. 명목 국민총소득(GNI)을 기준으로 한 비교다. 꼭 이런 수치를 들먹이지 않아도 남북의 경제력은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이고, 그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압도적으로 강하면 욕을 먹거나 미움을 받을지언정 무시를 당하거나 우습게 보일 일은 거의 없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인 한국은 언제부턴가 최빈국 북한에 조롱·모욕당하는 게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특등 머저리’ ‘태생적 바보’ ‘겁먹은 개’ ‘미국산 앵무새’ 같은 모욕적 표현만이 아니다. 과거에는 북의 거친 입에서 어떤 목적이 보였다면, 요즘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투의 경멸뿐인 느낌이다. 김여정은 우리 대통령에게 “세상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좀 돌아보라” “처신머리 골라 하라”며 아랫사람 훈계하듯 했다. 최소한의 예의·배려도 없다. 조금이라도 한국을 두려워하고 후과(後果)를 걱정한다면 이러지 못한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핵(核)이라는 최후의 보루에 대한 믿음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북 협상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전직 고위 인사는 “우리가 북한을 향해 언제 한번 국력을 집중해 쏟아부은 적이 있느냐”고 했다. 이것이 한국이 얕보이는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북한·북핵 문제는 우리 국민의 목숨과 미래가 달린 최우선 안보 현안이지만 그렇게 다뤄진 적이 없다. 항상 국내 정치, 선거의 하위 변수로 소모됐다. 이 부분에선 진보·보수 정권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치 논리가 앞서니 한쪽이 정책을 펴면 반대쪽은 기를 쓰고 반대한다. 대화든 압박이든 힘을 받지 못한다. 현장 관료들은 정권 바뀔 때마다 ‘적폐’로 찍혀 나가 경험이 축적되지도 않는다. 적을 눈앞에 두고 오른손과 왼손이 싸우는 셈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쟁(政爭)은 상수이지만 안보 문제를 놓고 이렇게 적전 분열하는 나라는 드물다.

북한 김씨 일가는 휴전선 이남의 국력이 하나로 뭉치지 않는다는 것을 수십 년에 걸쳐 체득했다. 이 정권 들어서는 아예 한국 정치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은 방어 무기인 사드 하나 들여오는 걸로 난리가 났고, 국제사회와 함께 수년에 걸쳐 쌓아 올린 대북 제재 시스템은 남북쇼에 목을 매다 스스로 허물었다. 김정은은 ‘대화 재개’ ‘올림픽 참석’ ‘서울 답방’ 카드도 여전히 갖고 있다. 적절히 운만 띄우면 선거를 앞둔 레임덕 정권은 덥석 받을 것이고 나라는 또 두 쪽 날 것이다. 국력이 50배든 100배든 김정은이 한국에 겁을 낼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몇십 배 이슬람 인구는 이스라엘을 증오하지만 결코 무시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국가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똘똘 뭉쳐 무엇이라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란이 핵개발에 나서자 이스라엘은 이란 핵과학자들을 차례로 암살했고 이란 수도에서 500㎏에 달하는 극비 자료를 빼내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폭격해야 한다고 했을 때 누구도 빈말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이스라엘식 암살·공작을 따라 할 필요는 없지만,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 한곳에 집중시킬 때 상대방에게 어떤 위협을 줄 수 있는지는 새겨봐야 한다.

‘안보엔 좌우가 없다’는 말은 그냥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외교 안보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고민한 진짜 전문가들은 배제하고 정파 이익이 최우선인 정치인, 이들에게 잘 보여 한자리 얻으려는 폴리페서, 영혼을 파는 일부 관료들만 설친다면 ‘특등 머저리’ 신세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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