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 엘리자베스 공주가 한눈에 반한 남자 필립공은 누구?

김소희 기자 2021. 4. 1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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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속에 여왕 폐하의 사랑하는 부군인 에딘버러 공작 필립공의 별세를 발표한다."

9일(현지시각) 영국 왕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에딘버러 공작·99)의 별세 소식을 알렸다.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정을 언제나 따라다니는 ‘외조의 왕’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이 돈독하기도 했다. 필립공은 지난달 16일 심장 수술을 받고 퇴원한 이후에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지막을 함께 보냈다.

필립공은 역대 영국 국왕의 배우자로 살았던 기간이 가장 길었던 사람이다. 그는 1947년 엘리자베스 당시 공주와 결혼하고 74년 동안 영국 왕실을 지켰다. 1952년 공주가 왕위를 물려받은 이후 여왕을 보필한 세월만 69년이다. 버킹엄 왕궁에 따르면 그는 약 5000번의 연설과 약 3만2000번의 단독 업무를 수행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왼쪽)과 그의 남편 필립공(에딘버러 공작)의 젊은 시절. 필립공은 9일 99세의 나이에 타계했다./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필립공은 앨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왕실 출신이다. 그는 1921년 그리스의 코르푸섬에서 그리스왕 콘스탄틴 1세의 조카이자 앤드류 왕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뒤따랐다. 당시 군주제가 전복되면서 온가족은 그리스에서 강제 추방당했다. 어머니 앨리스 공주는 정신장애를 앓아 수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아버지 앤드류 왕자는 모나코로 망명했다. 누이 세실은 만삭인 채로 비행기 사고를 당해 사망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영국에 친척이 있는 덕분에 필립공은 영국 기숙학교를 다니면서 영국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그가 영국 왕실과 친해지도록 도왔다고 한다. 필립공은 왕립 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해군으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필립공은 21세의 나이에 영국 해군에서 가장 어린 나이로 갑판사관이자 구축함 월리스의 제2 지휘관이 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지중해와 태평양에서 각각 시칠리섬 상륙작전, 영국군 구조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 테니스 네트 넘는 모습에 13세 엘리자베스 공주가 반해

엘리자베스 여왕과 남편 필립공의 인연은 유년시절부터 시작됐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8살 공주 시절 삼촌 조지 왕자(켄트 공작)의 결혼식에서 필립공을 처음 봤다. 당시 13살이었던 필립공은 조지 왕자의 신부였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의 사촌이었다.

이들의 본격적인 인연의 시작은 1939년 엘리자베스 공주가 13살, 필립공이 18살이었을 때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가족과 왕립 해군사관학교에 방문했다가 안내를 맡은 필립공과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공주는 필립공이 테니스 네트를 쉽게 넘어가는 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왕립 해군사관학교에서의 인연 이후 둘은 수년간 편지를 교환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편지에서 그를 "‘바이킹의 신’처럼 보인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들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후 다른 남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편지로 맺어진 사랑 끝에 이들은 1946년 여름 결혼을 약속했다. "전쟁에서 벗어나 승리를 맛보고, 다시 쉬면서 나에게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고, 완전히 그리고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랑에 빠지니 모든 개인적, 심지어 세상의 어려움까지 작고 사소하게 느껴진다." 필립공은 그해 공주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듬해 그들은 약혼식을 올렸다.

약혼식을 올렸던 1947년 그해에 필립공(왼쪽)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AP연합뉴스

◇ "나는 자식에게 성 물려줄 수 없는 유일한 남자"

필립공은 결혼 당시에는 왕의 사위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 직위를 물려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6세의 죽음으로 1952년 2월 6일 공주가 여왕에 즉위하면서 필립공의 신분도 바뀌었다.

조지 6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두 사람을 걱정했다고 한다. 남성적 기질의 필립공이 여왕의 그림자로 사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 여긴 것이다. 조지 6세는 생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필립은 뱃사람 같은 사람"이라면서 "한 번씩 파도를 탈 때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필립공의 강한 성격이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952년 여왕이 즉위했을 때 필립공은 왕실이 자신의 성 ‘마운트배튼’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여왕이 왕실의 원래 성인 ‘윈저’를 계속 쓰기로 결정하면서 갈등이 표출됐다.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이 나라에서 자식에게 성을 물려줄 수 없는 유일한 남자"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적응한 필립공은 여왕의 업무를 성실히 보필했다. 결혼기념일 50주년인 1997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식석상에서 "필립공은 내가 말하는 것을 너무 자주 들어야 했다. 우리는 나의 연설을 종종 사전 논의했고, 그는 직설적으로 견해를 줬다. 그는, 아주 간단하게, 나의 힘이 됐고 수많은 해를 함께 했다. 나와 그의 가족과 많은 나라가 그가 주장하는 것 혹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빚을 그에게 졌다"고 말했다.

2011년 여성의 날에 마차 뒷좌석에 타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왼쪽)과 필립공./AP연합뉴스

필립공은 연간 수백 건의 여왕 공식행사를 따라다니면서도 자선단체를 중심으로 800개가 넘는 기관과 교류했다.

그는 자신의 작위를 따서 ‘듀크 오브 에든버러 상(償)’이라는 청소년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56년 처음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들의 모험심을 키우고 봉사 의지를 북돋우기 위한 자기계발 및 탐험 활동으로 지금까지 세계 700만명 이상이 이 과정을 밟았다.

필립공은 또한 초창기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이끌었던 선구자로 통한다. 그는 세계 야생동물기금 초대 회장을 맡았고 자연보호 활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다. 필립공은 "자연환경 보호와 단순한 동물 애호는 차이가 있다"면서 "인구 증가는 자연보호의 가장 큰 도전이고 결국 자발적인 산아 제한이 자연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해왔다.

필립공은 90대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2011년 관상 동맥에 스텐트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인 2012년에는 여왕의 즉위 60주년 행사에서 비를 맞으며 두 시간을 서 있었던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에 걸렸다. 2017년에는 고령을 이유로 왕실업무에서 공식 은퇴했다. 98세이던 2019년 직접 랜드로버 SUV를 몰다가 다른 차량과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기도 했다.

필립공은 엘리자베스 여왕과의 사이에 찰스 왕세자,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앤 공주 등 3남1녀를 뒀다. 윌리엄 왕세손을 포함한 8명의 손자가 있다. 증손자는 10명이다.

10일(현지시각)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에 있는 스크린에 필립공의 사진이 걸렸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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