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포럼] 패전처리 투수

차세현 2021. 4. 13. 00:3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5년차 대통령은 패전처리 투수
한 번도 경험 못한 올해 국제 정세
좋은 패전처리 투수 보유국이 강국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어떤 투수가 승패가 기울었을 때 마운드에 오르는 걸 좋아하랴만 패전처리 투수는 144경기 장기 레이스를 치르는 프로야구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어느 팀도 모든 경기에서 다 이길 수 없고 패색이 짙을 때 전력 손실을 최소화해 잘 져야 다음 경기를 기약할 수 있다.

패전처리 투수라는 말이 가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투수 개인으로도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면서 실력을 쌓다 보면 언젠가 승리를 지키는 필승조에도, 선발의 꿈도 이룰 수 있다.

5년 단임제 하에서 한국의 5년차 대통령은 어쩌면 패전처리 투수랑 처지가 비슷할지 모른다.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여당은 ‘대통령 지우기’에 나선다. 정권 재창출에 부담을 주는 인기 없는 대통령에게 언제 탈당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정권 교체를 벼르는 야당의 공격은 칼날 같다. 특히, 이번 4·7 재보선처럼 임기 5년차 선거에서 참패라도 하면 대통령은 점수 차가 큰 경기의 패전처리 투수 신세다.

한때 선발투수로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는데 패전처리를 하려니 어깨는 축 처진다. 관중은 하나둘 자리를 뜨지만 그래도 잘 던져야 할 이유가 있다. 소속팀의 내일 경기, 모레 경기를 위해서다. 역사라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대통령에게 소속 팀은 물론 대한민국이다.

지금 다른 나라의 백신 접종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마스크 하나로 버티는 국민에게 백신을 하나라도 더 구해줘야 하고, 급등하는 전·월세에 밤잠 설치는 서민을 위해 집값을 안정시켜야 한다. 특히, 전세계 내로라하는 타자들이 즐비한 외교·안보현장은 5년차 대통령에겐 더 버겁지만 그래도 버텨내야 한다.

과거 5년차 대통령은 해외 순방을 많이 갔다. 외교부는 임기 4년 동안 가지 않은 나라를 챙기시라고 권유한다. 국내정치에 영이 통 안 서는 대통령은 이 달콤한 의전의 유혹에 빠졌다. 하지만 올핸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서소문 포럼 4/13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 탓도 있지만 지금의 국제정세는 한가하게 순방을 다닐 때가 아니어서다. 미·중 패권 갈등 속에 어쩌면 임기 5년차 1년이 앞으로 대한민국의 100년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의 5년차 대통령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격랑의 국제정세다.

패전처리 투수의 제1과제는 경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거다. 자칫 대량 실점을 해 경기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동료들의 체력은 고갈되고 당연히 내일 경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5년차 대통령도 무리하게 일을 벌이다 실패하면 다음 정부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다행히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은 정의용 외교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인상적인 당부를 했다. “주어진 시간 내 가시적 성과를 올리기 위해 서두르지 말라”고. 지난 2일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안보실장 회의에 참석한 서훈 실장도 “남북관계와 비핵화는 정권을 이어서 해결해야 할 초당적 문제다. 저희가 솔선해서 그런 입장에서 남북관계와 비핵화 협상에 임하겠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2007년 퇴임을 4개월 앞두고 남북 정상회담을 한 노무현 전 대통령 사례를 우려했는데 좋은 패전처리 투수가 될 조짐이 보인다. 힘을 빼야 투수의 공끝은 살아난다.

주자를 더블 플레이로 잡아 경기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MB(이명박)정부는 5년차인 2012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내린 5·24 조치를 임기 안에 해제하기 위해 북한과 물밑 협상을 시도했다. 북한이 호응하지 않아 실패했지만 내가 내보낸 주자는 내가 처리하겠다는 결자해지였다.

문재인 정부가 더블 플레이를 시도한다면 아무래도 한·일 관계일 것 같다. 한국과 일본 모두 사정은 썩 좋지 않지만 차기 정부의 한·일 관계와 한·미·일 공조를 위해 지는 게 이기는 대승적 결단을 내렸으면 좋겠다.

좋은 패전처리 투수가 있는 팀은 우승확률이 높은 강팀이다. 정권 재창출이 되든, 정권 교체가 되든 다음 정부를 위해 임기 5년차를 묵묵히 보내는 대통령을 보유한 나라야말로 강국이다.

올 프로야구에 새로 간판을 내건 SSG 랜더스의 전신을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2년 원년 멤버인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다. 당시 슈퍼스타즈엔 영화로도 제작돼 유명해진 감사용이라는 패전처리 투수가 있었다. 현역 5년간 성적은 1승15패1무1세이브였는데 그는 자신의 ‘인생경기’는 유일한 1승을 기록한 롯데 자이언츠전이 아니라 패전처리로 나왔다가 무려 8이닝을 던지고 무승부를 기록한 OB 베어스(지금의 두산 베어스)전이라고 회고했다. 임기 5년차 정부의 무승부를 기대해본다.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