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시장이 던진 K방역 수정판, 文정부와 엇박자
서울시가 ‘상생 방역’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방역 매뉴얼을 추진하면서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방역 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12일 “정부와 차별화된 방역 대책을 통해 민생과 방역을 모두 챙기겠다”며 업종별 특성에 따라 영업시간 연장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한 거리 두기 방안을 내놨다. 1년 넘게 이어져 온 정부 주도 방역에 변화를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당장 정부와 여당 공세가 시작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특별 방역 점검 회의에서 “방심하다가는 폭발적 대유행으로 번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국면”이라고 선을 그었다. ‘상생 방역’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더불어민주당도 서울시 발표가 나온 직후 “정부 입장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방역 당국 조치를 서울시가 마음대로 건들지 말라며, 오 시장이 던진 ‘K방역 수정론’에 당정이 시작부터 제동을 건 셈이다.
◇정부와 다른 오세훈표 ‘거리 두기’
오 시장은 이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률적인 ‘규제 방역’에서 벗어나 민생과 방역을 모두 지키는 ‘상생 방역’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밝혔다. 그는 “서울 경제를 지탱하는 동네 상권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재난 지원금을 주고 손실 보상을 추진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며 “더딘 백신 접종 속도를 볼 때 이 상황이 연말, 내년 상반기까지 갈 수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해법은 영업할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 계획은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를 활용해 검사 후 음성 판정이 나온 사람만 식당이나 노래방, PC방 등 시내 영업점을 이용하게 한다는 것이다. 대신 각 영업점은 업종별 특성에 따라 영업 시간을 늘려준다. 예를 들어 유흥주점의 경우 현재는 일률적으로 오후 10시에 문을 닫게 하지만, 앞으로는 단란·감성주점·헌팅포차는 ‘오후 5시~12시’, 콜라텍은 ‘오후 10시까지’, 홀덤펍은 ‘오후 4시~11시’ 같은 식으로 업종별 특성을 고려해 영업 시간을 달리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그동안 ‘2주만 더'를 되풀이하며 거리 두기 조치를 계속 이어왔다. 정부가 안전한 백신을 조기에,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방역만 강조하면서 국민 피로감은 한계에 달하고 소상공인들의 비명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오 시장이 정부 주도 방역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오 시장은 “영업 시간을 업종별로 다르게 하면 밤 9시나 10시에 사람들이 대중교통에 한꺼번에 몰리는 것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다”면서 “대신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아 코로나 확산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정말 엄격하게 ‘원 스트라이크 아웃제'를 적용해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방침의 전제가 되는 자가진단 키트는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가 나지 않아 현재 국내에서는 상용화되지 않은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상혁 대한백신학회 부회장은 “자가진단 키트는 정확성이 낮아 바이러스양이 적을 경우 양성인데도 음성으로 나올 확률이 높다”며 “이를 전제로 한 거리 두기는 위험 요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오 시장은 “정부가 결단해 자가진단 키트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식약처의 사용 승인과 별도로 야간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노래방을 대상으로 신속항원 검사 키트를 지급해 시범 사업을 하겠다는 방침이다. 코인노래방을 포함해 서울에만 약 5400여곳이 있다.
다만 영업 시간을 업종별로 연장하는 조치는 정부와 업종별 대표 단체, 방역 전문가들과 충분히 논의해 신중하게 시행하겠다고 했다. 이번 주에 서울형 거리 두기 매뉴얼을 만들고, 다음 주중 시행 방법과 시행 시기 등에 대해 중대본과 협의할 계획이다. 오 시장은 “(노래방 등) 특정 업종에 한해 시범 실시 하는 경우에도 중대본과 협의를 거쳐 현장의 혼란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감염 확산 우려, 당정 견제가 관건
오 시장의 방역 대책 발표에 정부와 민주당은 ‘일관된 정책 기조가 흔들린다'며 견제구를 날렸다. 이날 최인호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방역과 예방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부와 방역 당국의 입장이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 홍영표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오 시장의 부동산 관련 정책 기조를 비판하다가 “코로나 방역 문제 하나만 해도 서울과 부산시장이 다른 정책을 취하게 될 때 또 걱정이 된다”며 우려를 표했다. 정재훈 가천대 교수는 “서울시의 거리 두기 취지는 적극 공감하나, 4차 대유행이 확산되는 시기에 영업시간 연장은 우려되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방역 당국은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면서도 ‘일사불란(一絲不亂)’을 강조했다. 지자체가 중앙 정부의 조치에 따라야 한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이날 “우리처럼 면적이 좁은 국가에서는 지자체와 정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면서도 “서울시는 수도권이라는 강력한 생활권으로 묶여 있는 만큼 전체적 상황을 고려하며 (중앙정부와) 협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도 오 시장의 요구를 계기로 일부 조치에서 변화를 꾀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자가진단 키트 도입에 대해 윤 반장은 “자가진단 키트 적용은 적극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서울시에서 시범 사업을 검토하겠다는 부분은 허가 이후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방역 권한은 정부·시도지사가 동등
거리 두기 조치를 두고 지자체와 정부 간 힘겨루기 모습이 연출되는 것은 현행법상 감염병 예방 조치 권한을 질병청장과 지자체장, 복지부 장관에게 거의 동등하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감염병예방법 49조에 따르면 현재 시행되고 있는 거리 두기 조치와 마스크 착용·출입명부 작성 등 기본 방역 수칙은 이들 모두에게 내릴 권한이 있다. 따라서 지자체장이 독자적으로 거리 두기 조치를 내리더라도 중앙 정부는 법률상 이를 막을 권한이 없다.
실제로 감염병 사태가 터질 때마다 정부와 지자체의 크고 작은 갈등은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다. 2015년 6월 메르스 사태 때는 당시 야당이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환자가 접촉한 강남 재건축조합 참석 조합원 1565명을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복지부와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앞서 지난 1월에도 대구시와 경주시가 카페·음식점 등의 영업 제한 시간을 정부 방침(밤 9시)보다 완화된 밤 11시로 정해 발표했다가 방역 당국의 견제가 시작되자 하루도 안 돼 철회했다. 한 요식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영업시간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는 바람에 매출이 급감했는데, 지자체까지 나서면 도대체 어느 곳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김우주 고려대 교수는 “지금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충돌하는 것은 전쟁 중 사단장과 여단장이 서로 다투는 것과 같다”며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지 말고 방역 자체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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