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의 꽃산 꽃글]심학산 아래 벚나무 밑에서의 한 생각
[경향신문]
서거정의 <동문선> 서문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네이버 열린연단의 한 에세이에서 만난 대목이다. “하늘과 땅이 생겨나자 해와 달과 별이 하늘에 총총하게 들어서고, 땅에 산과 강과 바다가 나타나, 이것이 천지의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이 나타나 하늘의 괘를 긋고 문자를 만들자, 그에 따라 사람이 시서예악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지의 기본적인 형체에서 글, 문(文)이 생겼다는 것이다.”(김우창, 세상의 무늬)
파주 출판단지를 굽어보는 심학산은 그 이름에서 깊은 맛을 풍긴다. 지하로 깊숙이 내통하는 저 산과 창밖 가로수 사이로 차례차례 배열되는 게 있다. 숨어 있는 몇 기의 무덤, 사하촌처럼 즐비한 식당 그리고 전원주택과 출판사.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세상의 무늬를 이룬다. 봄인가 했는데 벌써 봄은 가고 후끈, 여름이 도래했다.
헤르만하우스 단지 앞 가로수 아래를 걸어가는데 떨어진 꽃잎이 곳곳에 무성하다. 어제까지 나무에 달려 있던 꽃잎은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숨기고 나무 아래 뒹군다. 시치미 뗀 채 아직도 서성거리는 작년 낙엽도 있다. 본래를 잊지 않으려는 모양, 부모의 슬하를 차마 못 떠나는 모습이 이와 같을까. 나무에 있을 때 꽃의 형상을 이루었으나 아래로 떨어지면서 걸었던 어깨를 풀고 홀로 내려앉는 꽃잎. 가지에서 그 운명이 서로 다른 꽃송이들은 낙화가 되고서야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흙속으로 가는 건 그만큼 좁고 외로운 길이다.
가지에 달려 있을 때 여러 장이 합심한 형태의 꽃이었다가, 가뭇없이 떨어져 단독자로서의 꽃잎들. 길바닥에 흩어진 그것은 부러진 숟가락 혹은 자루 없는 삽을 닮기도 했다. 밥 먹을 때의 숟가락, 떠나는 이의 봉분을 마지막으로 완성하는 삽. 왜 이렇게 숟가락과 삽은 서로 통하는 물건인가. 사람의 일생을 직접적으로 시작-운반-마무리하는 도구인 그 둘은 오늘 내 발밑을 움푹하게 자꾸 파고든다. 스프링처럼 뛰어오르는 햇살이 가슴을 찌를 때의 더러 아찔한 현기증은 이런 세상의 무늬에서 유래했는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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