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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순수한 분노

백승찬 문화부 차장 입력 2021. 04. 13. 03:02 수정 2021. 04. 1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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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경찰들은 지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거친 행동을 일삼는다. |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 소년 이사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큰 부상을 당한다. | 영화사 진진 제공

15일 개봉하는 프랑스 영화 <레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과 희미한 연결고리가 있다. 19세기 위고가 고발했던 ‘비참한 사람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파리 근교 빈곤지역인 몽페르메유의 질서는 경찰과 범죄조직의 협조 아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다. 소년 이사가 장난으로 서커스단의 아기 사자를 훔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경찰이 이사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구들과 충돌한다. 수적으로 밀린 경찰은 우발적으로 고무탄을 발사하고, 이사가 맞아 크게 다친다. 주위를 배회하던 드론이 이 광경을 촬영한다. 경찰은 영상을 찾아 없애기 위해, 범죄조직은 영상으로 경찰을 협박하기 위해 얽힌다.

다큐멘터리처럼 촬영된 영화 종반부는 힘이 넘친다. 부당한 질서에 분노한 소년들은 지역의 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든다. 이들은 당장의 이권도, 미래의 전망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거슬리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나이 많은 어른이든, 경찰이든 조직폭력배든 상관없다. 소년들의 분노는 돌진하는 멧돼지 같아서, 지역의 질서는 거미줄처럼 찢겨나간다.

오늘의 질서는 공고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작은 불씨 하나로도 불탈 수 있다. 청년의 순수한 분노는 때로 기성세대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넘어 사회를 재편하는 원동력이 된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는 20대의 표심이 주목받았다.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20대 이하 남성의 72.5%가 오세훈을 지지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이남자’의 보수화를 지적하지만, 20대 남성이 10년 전의 서울시장 오세훈에게 갑자기 끌릴 이유는 없다. 지난 총선에서 고민정에게 패배할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던 오세훈은 그저 더불어민주당의 중심인 86세대보다 덜 오만하고 덜 위선적으로 비쳤을 뿐이다.

20대 이하 여성이 소수정당·무소속에 투표한 비율은 전 세대·성별 중 가장 많은 15.1%였다. 젠더 이슈를 적극적으로 내세운 제3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없다한들, 오만한 민주당과 구태의연한 국민의힘에는 표를 줄 수 없다는 신호다.

제21대 총선을 넉 달여 앞둔 2019년 11월 유시민은 일각에서 제기된 ‘86세대 용퇴론’을 두고 “다 나가면 소는 누가 키우나”라고 말했다. 청년 세대에 대해서는 “무리를 형성해서 밀고 올라와라”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청년 세대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을 터다. 실제 청년 세대는 민주당 86세대의 선심에 기대 공천의 말석에 자리했고, 86세대는 총선에서 큰 승리를 거둔 뒤 불과 1년 사이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다.

김세연은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830세대(80년대 출생·30대·2000년대 대학 입학)로의 급격한 전환이 필요하다”“며 “과도기적으로 X세대(1970년대생)가 중간계투를 맡되, 현재의 30대와 20대에게 주도권이 빨리 넘어갈수록 국가 전체의 역량이 잘 발휘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70년대생인 나는 상황에 따라 우리 세대가 중간계투를 맡을 필요도 없이 20~30대가 바로 등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점증하는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다. 지금은 노인의 지혜, 숙련자의 능숙함이 아니라 청년의 분노, 초심자의 과감함이 필요한 때다.

백승찬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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