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백보다 더 있어 보여요" 그래서 그림에 지갑여는 MZ세대

이소아 입력 2021. 4. 13. 05:01 수정 2021. 4. 1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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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을 감상하며 직접 구매까지 이뤄지는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2021 BAMA)가 11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려 휴일은 맞은 시민들이 몰려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10회째를 맞은 올해 대회에는 부산지역 화랑 40곳, 도쿄 미즈마 등 해외 화랑 13곳 등 모두 176개 화랑이 참가해 4천여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송봉근 기자


“우리가 처음에 명품백을 공부하고 샀나요? 예쁘고 갖고 싶어서 샀잖아요. 미술품도 큰 욕심내지 말고 100만~200만원 정도로 해보다가, 흥미가 느껴지면 공부도 하고 금액도 늘리는 거죠. 어렵고 부자만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즐기면서 해보세요.”
자신을 39살 직장인 콜렉터(collector·수집가)라고 소개한 A씨가 초보 수집가들에게 하는 조언은 최근 미술 시장에 부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던 미술 시장이 빠르게 대중화하고 있다. 고액자산가 등 소수의 집단 외에도 20~40대 젊은 층에서 취미와 놀이의 대상으로, 자랑하며 즐기는 플렉스(flex) 문화 등으로 저변이 넓어진 게 특징이다.


미술시장 지배하는 2030
미술품을 사고파는 경로는 작가 본인, 갤러리(화랑), 아트페어(미술장터), 경매장(옥션) 등 다양하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온라인 미술시장 플랫폼이 활성화하면서 젊은 수집가들의 활동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미술품 구매자의 세대별 비중.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미술장터인 ‘아트바젤’과 이를 후원하는 금융기업 UBS가 펴낸 ‘2021 미술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미술시장의 ‘큰 손’ 절반 이상은 2030세대다. 미술품을 구매한 자산 100만 달러(약 11억원) 이상 수집가 2569명 중 52%는 밀레니얼 세대, 4%는 Z세대였다. 이들은 각각 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다. 온라인 거래 비중은 25%로 전년 9% 대비 3배 가까이 급증했다.

온라인 미술거래 규모.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밴드에 체험까지 화랑은 ‘변신’중

갤러리 BHAK를 운영하는 박종혁 대표가 서울 한남동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 앞에 섰다. 이소아 기자

이런 변화는 전통적 양식을 고수하던 화랑에서도 나타난다.
‘물방울 그림’ 김창열 작가,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 작가와 각별한 관계를 이어온 28년 역사의 박영덕화랑은 지난해 12월 위치를 서울 청담동에서 한남동으로 옮기고 이름을 BHAK로 바꿨다. 경영 실무도 박영덕 대표의 장남인 박종혁(28) 대표에게 일임해 ‘젊은 화랑’을 전면에 내세웠다.

화랑에서 만난 박 대표는 “20~40대 중심으로 매출이 늘었다”며 “과거엔 20대는 거의 구매자가 없고 30·40대도 구매 예산이 500만원 아래였는데 최근엔 젊은 수집가들의 구매 수준이 1000만~5000만원 정도로 커졌다”고 말했다.

지심세연 작가가 즉석에서 페인팅 작업을 하는 모습과, 그의 작품(오른쪽).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

이에 따라 화랑은 내부 색상을 보다 역동적으로 바꾸고 지하 전시 공간에 설치한 밴드 공연과 관객 체험형 전시를 확대하는 등 시장 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온라인 전시 활동과 소통은 필수다.
박 대표는 “갤러리에서 단순히 그림만 보는 것 외에도 패션쇼·영화·강연·공연 등 함께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많다”며 “그동안 보수적이었던 업계 분위기를 탈피해 종합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거듭나려고 한다”고 밝혔다.


가구만큼 익숙한 미술
이런 미술 시장의 변화는 인구학적 특성과 환경적 요인이 맞아떨어진 현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밀레니얼과 Z세대를 통칭하는 MZ세대는 어릴 때부터 각종 전시·미술관·오페라·뮤지컬 등 문화생활을 하며 자라 어른이 돼서도 자연스럽게 문화 소비를 즐긴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입장료가 1만원 정도인데 예술 전시를 보는 게 대단히 비싸거나 고급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수천·수억 원 짜리 작품을 사는 게 아니라 몇 십만원, 100만~200만원 정도 쓰는 건 다른 레저나 스포츠 취미도 마찬가지인데 미술이 상류층의 전유물이란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라고 했다.

북유럽 조명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덴마크 조명 브랜드 ‘루이스폴센’이 서울 성수동에 단독 매장을 열었다. 사진 루이스폴센

미술품을 인테리어의 일부로 선호하는 사람도 늘었다.
최근 그림대여 서비스 업체인 ‘오픈갤러리’에서 100만원 상당의 작품을 구입한 이모(29)씨는 “예전엔 거실에 결혼사진이나 가족사진을 걸어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림 한 점이 인테리어의 화룡정점이 된다고 느껴 나만의 그림을 소유하고 싶단 욕구가 생겨 구매했다”고 했다.

지난 9~11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10회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도 억눌렸던 미술품 소비 수요와 봄철 인테리어 수요에 미술품 재테크 수요까지 더해지며 문전성시를 이뤘다. 부산화랑협회 측은 개막 이틀 만에 1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화랑들이 다수 나오는 등 설립 이래 최대 성과를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소비 트렌드 분석가 이정민 트렌드랩506 대표는 “MZ세대는 의자·테이블·조명 등도 하나의 오브제로 보고 어떤 브랜드의 어느 디자이너가 만들었는지 따져서 구매하는 성향이 강하다”며 “현대 미술은 고전 미술과 달리 미디어아트와 팝아트 등 디자인 분야와 결합해 대중과의 접점이 크게 넓어졌다”고 해석했다.


명품 지겨워진 밀레니얼들
명품 소비 수요가 미술품으로 이동하는 현상도 감지된다. 대학 시절부터, 거리에서 3초에 한 번씩 볼 수 있다는 루이뷔통 ‘3초 백’을 보며 십수년 간 명품을 경험한 30대 이상이 미술품에 눈을 돌린 것이다.

잠원동에 사는 워킹맘 한모(35)씨는 화랑을 다니며 미술품 정보를 공유하는 멤버 8명이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함께 ‘홍콩 아트바젤’도 다녀왔다. 그는 “요즘은 대학생·고등학생도 몽클레어 패딩, 디올 백팩에 구찌 스니커즈를 착용하고 다니는데 30·40대가 샤넬백 하나 있다고 어깨에 힘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며 “유행이 지나면 장롱에 쌓아두는 명품백에 비해 그림은 오래 즐길 수 있고, 잘만 고르면 가치가 급등할 수도 있으니 훨씬 합리적인 소비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겸손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긴 기성세대와 달리, MZ세대는 자랑하고 드러내는 걸 긍정적인 문화로 여긴다“며 “음악은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 인증하기 어렵지만 그림은 쉽게 찍어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플렉스하기 좋은 대상”이라고 말했다. 꼭 과시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대상에 돈을 아끼지 않는 ‘취향 소비’는 이미 10~30대 사이에서 뚜렷한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유튜브에서 온라인 경매중인 '켈리온레드바이브' 채널(왼쪽)과 수집가의 집에 걸린 그림을 둘러보는 '아트메신저 이소영'채널의 콘텐트. 사진 유튜브 캡처


미술 시장의 문턱을 실질적으로 낮춘 데에는 정보기술(IT)의 역할이 컸다. 미술업계가 기술에 익숙한 젊은 층을 겨냥해 온라인 경매, 온라인 전시, 온라인 뷰잉 룸 등을 확대했고, 이런 투자가 다시 젊은 층을 끌어들이는 선순환을 낳았다.
유튜브에서도 ‘켈리온레드바이브’ ‘아트메신저 이소영’등의 갤러리스트(화상)나 아트 디렉터들이 실시간 경매, 아트페어 생중계, 미술 시장 강좌 등 다양한 콘텐트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RM이 좋았다는 그림이 뭐야?
유명 인사와 연예인들의 미술 애호 활동은 젊은 층 중심의 미술시장 대중화를 가속화할 전망이다. 일례로 BTS(방탄소년단)의 멤버 RM, 빅뱅의 지드래곤과 탑 등이 소개한 그림이나 그들이 다녀 간 아트페어와 전시회는 단번에 SNS 등을 타고 알려져 화제가 되곤 한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가수 솔비(권지안)와 배우 하정우 등의 작품도 높은 값에 팔리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중인 BTS멤버 RM. 사진 트위터 캡처


영상 기획자로 활동하는 라종민(40) 작가는 “미국이나 중국은 작은 소품이라도 미술품을 사고파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데 한국은 유난히 심리적인 장벽이 높았다”며 “대중가요·재즈·클래식·록 등 세분화해서 즐기는 음악에 비해 미술은 하나로 뭉뚱그려 인식되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최근 들어 새로운 경험에 대한 즐거움, 그 경험을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확실히 커진 것 같다”며 “자기 색깔이 확실한 그림이 좋은 반응을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작가들의 지향점과도 맥이 통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소아·배정원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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