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소식에, 수십년만에 나타난 친척 "1억만 달라" [기부,부의 품격③]
“내가 ‘물봉’인가….” 김병호(80) 서전농원 회장의 부인인 김삼열(71) 여사는 최근 한 사적인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내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물봉(돈 대는 ‘물주’와 이용만 당하는 ‘봉’의 합성어)으로 여기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동아리 가입 권유에 응했지만, 막상 몇 차례 나가보니 찬조금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쳐 350억원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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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소식 듣고 70년 만에 처음 본 친척 “1억만”
하지만 고액을 기부한 이후 김 회장 부부의 일상은 오히려 피곤해졌다. 언론을 통해 기부 소식이 알려지자 각종 사회·시민단체에서 ‘회원으로 모시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막상 가보면 기부금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기부를 바라는 편지가 올 정도였다.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이제 김삼열 여사는 소소한 동호회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조차 익명으로 가입한다.
김 회장이 운영하던 사업장에서도 불만이 나왔다. ‘수십 년간 일했는데 땅 한 평 안 나눠주더니 대학에 기부했다’는 것이다.
다른 고액 기부자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KAIST에 기부한 A씨는 기부 이후 상속 문제를 놓고 가족 간 불화가 터졌다. B씨는 자녀들에게 일정 금액을 공평하게 나눠줬지만, 명절 때만 되면 여전히 ‘받은 돈이 적다’는 볼멘소리를 듣는다. C씨는 기부 행사에 초대한 손자가 불참하는 바람에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간 한 번도 얼굴을 못 봤던 친척이 나타나 ‘1억원만 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고액 기부자들이 이 같은 주변의 시선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병호 회장은 여섯 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자신은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김 회장은 “이쑤시개 하나를 8번이나 재활용하면서 평생 아낀 돈을 기부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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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로 얻은 인연…“양부모·새형님 생겼어요”
이렇게 마음을 다치는 일도 있지만, 기부를 후회하진 않는다. 새로운 인연과 행복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김병호 회장은 거액을 기부를 했던 2011년 당시 총장이던 서남표 미국 MIT 명예교수와 지금도 안부를 주고받는다. 김 회장은 “기부를 계기로 지금은 (서 전 총장을) 형님으로 모시게 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KAIST 고액 기부자인 고(故) 조천식 전 은행감독원 부원장 부부와는 아예 양부모·양자녀 관계를 맺었다. 김병호 회장의 고액 기부 소식을 신문에서 보고 고 조천식 전 부원장이 먼저 연락했다.
김 회장은 같은 스포츠센터 회원인 손창근 미술품 수집가로부터 ‘KAIST에 기부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손 회장에게 KAIST 기부 담당자의 연락처를 일러줬다. 지난달 13일 KAIST에 200억원 상당의 건물을 기부한 장성환(92) 삼성브러쉬 회장 역시 이들과 인연이 있다. 장 회장의 부인 안하옥(90) 여사와 김삼열 여사는 같은 합창단 회원이다. 김병호 회장 부부를 위해 KAIST는 생일 떡을 보내주는데, 10여 년 동안 이를 눈여겨보던 장 회장 부부가 KAIST에 기부를 결심했다.
김삼열 여사는 “우리가 KAIST에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기부로 맺어진 더 깊고 끈끈한 ‘KAIST 학연’이 생겼다”며 “평생 함께할 인연을 찾았기에 기부를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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