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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들파들 떨면서도 피해자를 구해준 '겁쟁이 아가씨'

김형민 입력 2021. 04. 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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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스 사건을 보도한 〈뉴욕타임스〉는 현장 주변의 시민을 비겁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현장에는 범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뛰어 내려와 피해자를 안아준 여성이 있었다.
1964년 3월13일 미국 뉴욕에서 살해당한 키티 제노비스. 이 사건으로 ‘방관자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생겼다. ⓒ위키백과

1964년 3월13일 새벽, 미국 뉴욕주 퀸스에서 28세 여성 키티 제노비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어. 퇴근하는 제노비스를 따라온 범인이 갑자기 칼을 휘둘렀고 근처 아파트 거주자가 “그녀한테 손대지 마”라고 고함을 지르자 그 자리를 벗어났다가 다시 범행 현장으로 돌아와 피해자를 죽여버렸다. 범죄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뉴욕의 밤거리에서 한 여성의 죽음 자체는 그렇게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어.

〈뉴욕타임스〉에서도 고작 네 문단짜리 기사로 처리할 정도였지. 범인도 곧 체포됐다. 그런데 〈뉴욕타임스〉 대도시 담당 편집자인 A. M. 로젠탈은 마이클 머피 경찰국장과의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듣는다. “범인 말이 (그녀에게 손대지 말라고 소리 질렀던) 남자가 창문을 닫고 곧 다시 자러 갈 거라고 생각했다는군. 그 남자 말고도 현장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얘기를 책으로 써보면 어때?” 로젠탈은 특종임을 직감하고 마틴 갱스버그 기자에게 취재를 지시했지. 그리고 며칠 뒤 〈뉴욕타임스〉 1면에 이 사건이 등장해.

“준법정신이 투철한, 훌륭한 퀸스 시민 38명은 살인자가 큐가든스에서 한 여자를 뒤쫓으면서 흉기로 세 차례 공격하는 모습을 30분 이상 지켜보았다(케빈 플린 지음, 〈뉴욕타임스 크라임〉).” 이 기사는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이 ‘비겁한 악당들이 사는 동네’에 분노했고, 언론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받아 더 자극적인 기사를 써댔지. 〈라이프〉는 “목격자들은 대부분 심야 쇼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처럼 어두운 창문에 쭈그리고 앉아서 상황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한층 실감나게 이 사건을 보도했어.

이 사건은 미국 사회는 물론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긴급 신고 전화번호가 ‘911’로 통일된 것도 이 사건 이후였고, 시민의식·용기·비겁 등 수많은 키워드들이 미국을 비롯한 지구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 뉴욕과는 지구 반대편에 살았던 아빠도 어렸을 때부터 이 사건을 들었다. 미국에서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아무도 신고하거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서 어른들은 이런 교훈을 전했지. “집에 도둑이 들면 ‘도둑이야’ 하면 안 돼. 아무도 안 나와. 자기도 다칠 수 있으니까. 그때는 ‘불이야’ 하는 거야. 자기도 피해를 보니까 달려나오게 되거든.”

이 사건은 심리학의 연구 소재가 됐고 ‘방관자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를 탄생시켰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즉 공공연한 시선이 존재한다고 믿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의미한단다. 이 방관자 효과는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 불릴 만큼 제노비스 사건의 지대한 영향 아래 이론으로 정립됐지. 비슷한 사건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아빠는 방송 취재차 만났던 한 아주머니의 기억을 떠올렸어.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이 아주머니는 이혼 도장을 찍기 위해 법원에 갔다가 법원 앞에서 남편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단다. 남편이 거짓말로 “바람나서 자식 등록금을 남자에게 갖다바친 X”이라고 소리를 지르자 행인들은 혀를 차며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해. 엄연히 폭력 범죄였지만 ‘불륜을 저질렀으니까’라는 합리화 속에, 또 덩치 큰 남편의 주먹 앞에 다들 고개를 돌려버린 거지. 아주머니는 길바닥에서 밟히는 지경에 이르렀어.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한 젊은 여성이 핸드폰을 들고 끼어들었다지. 그러나 그녀는 흔히 말하는 여장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가씨는 말리는 내내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내 보기에도 나만큼 겁먹었던 것 같아. 그런데도 계속 뒤따라오는 거예요. 이빨 딱딱 부딪치면서 ‘아저씨 때리지 마세요, 신고할 거예요’ 하면서. 그 아가씨가 내 목숨을 구해준 거예요. 나는 그날 (맞아서 죽는 게 아니라) 자살했을지도 몰라요. 길거리에서 그 꼴 보이고 살아갈 기력이 없었을 것 같아.”

그 후 아주머니는 버스를 타거나 길을 가면서 그 여성과 체격과 인상이 비슷한 이들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두 번 세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해. 언젠가는 그녀를 만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지. 그리고 본인도 누가 맞는 걸 보면 그날의 ‘겁쟁이 아가씨’를 생각해서라도 몸이 먼저 나서고 말이 빨라졌다는구나.

38명의 시민이 살인사건을 방관했다고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

경찰과 감옥을 넘어서는 용기와 배려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보자. 과연 키티 제노비스 사건 때 그 현장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역사에 남을 만큼 비겁했을까. 그녀에게는 빌이라는 남동생이 있었어. 누나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2년 뒤 해병대에 입대한다. 누나를 그토록 참혹하게 죽게 내버려둔 대중의 무관심이 몸서리치게 싫었다는구나.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누나의 사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생환한 빌 제노비스는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었어. 2004년 이후 그는 누나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현장을 TV 중계하듯 지켜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정말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을까. 조사 결과는 180°까지는 몰라도 170°는 족히 되는 반전이었어.

“범인이 처음 키티를 흉기로 공격하는 걸 본 주민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피해자의 비명 소리를 들은 몇몇 주민들은 가정폭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최소 2명의 이웃은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다. 특히 소피아 파라르라는 여성은 키티를 도우러 뛰어 내려왔고, 키티가 숨질 때 그녀를 안고 있었다(〈한겨레〉 2016년 6월30일, ‘52년 전 방관자 효과, 모티브 사건은 〈뉴욕타임스〉 왜곡 보도’).” 키티 제노비스는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을 새벽 3시30분에 변을 당했고 살해 장소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만한 곳도 아니었어. 사건담당 검사의 말도 그랬다. “우리가 진술을 인용할 수 있는 목격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그중 두 명이 신고를 했고 소피아 파라르는 범인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달려 내려와 피해자를 보호했지. 〈뉴욕타임스〉는 이런 상황을 몽땅 빼먹고 자극적인 ‘양념’만 그득한 기사를 썼던 거야. 당시 뉴욕에도 피해자를 위해 위험을 감수했던 용감한 사람이 분명히 있었는데 말이다.

제노비스 사건의 진실은 그렇게 새삼 다른 형상으로 빛을 보았다. 이렇게 보면 제노비스 사건에서 〈뉴욕타임스〉가 저지른 가장 큰 허물 중 하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피해자에게 달려와서 그 마지막을 지켰던 파라르를 사건에서 소거했다는 점이 아닐까 해. 〈뉴욕타임스〉는 기사를 통해 여러 색깔의 공포를 창조했고 그 공포는 태평양 너머 아빠에게도 전염되었거든. 하지만 앞서 얘기한 가정폭력 피해자 아주머니가 보여주듯이 용기 또한 전염될 수 있어. 〈뉴욕타임스〉는 기사의 흥미를 위해 용기의 전염원(?)을 차단했던 거란다.

제노비스를 살해한 범인은 몇 년 전 감옥에서 죽었고, 사실 왜곡 기사를 수용한 편집자 로젠탈도 유명을 달리했다. 사람들의 일상은 그렇게 역사가 되어가고, 역사로부터 사람들은 저마다 일상의 빛과 어둠을 배우게 되는 것이지. 성인군자들만 모아놓은 사회에서도 범죄는 발생한단다. 그렇게 부족하고 흠 많은 존재가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 범죄를 막아서는 건 경찰과 감옥을 넘어서는 사람의 용기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것을 기억하자꾸나.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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