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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차 향해 '121km 분노의 돌진'.. 작년 봄, 해남 도로에선 무슨 일이

조홍복 기자 입력 2021. 04. 17. 15:00 수정 2021. 04. 17.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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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충돌로 아내 죽인 남편에
재판부 "살인 인정, 징역 20년"

[사건 블랙박스]

지난해 5월 19일 오후 6시 13분, 전남 해남군 마산면 왕복 2차로 도로. 쏘렌토 차량이 목포에서 마산면 방면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한적한 시골 도로라 평일 퇴근 시간이었지만 차량이 많지 않았다. 운전자 박모(52)씨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부터 이혼 소송 중인 아내 임모(41)씨를 만나려고 했으나 헛걸음을 한 탓이다. “이혼은 안 된다”는 박씨의 요청에도, 아내와 작은 아들(20)은 묵묵부답이었다. 전날 ‘혼자 잘 살려고 그러냐, 같이 죽자’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터라, 아내는 마음의 문에 빗장을 굳게 질렀다.

“이런 것들이 있으나마난께…” “빨리 죽여부시오…”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이날 오후 5시 38분쯤 박씨는 중얼거렸다. 아내와 만남을 허탕친 뒤 운전대를 잡으며 ‘살인을 예고하듯’ 혼잣말을 한 것이다.

지난해 5월 지난 19일 오후 발생한 전남 해남군 마산면 왕복 2차로 사고 현장./해남소방서

◇아내 차량 발견하고 가속 페달, 121㎞ 속도로 중앙선 넘어 ‘쾅’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박씨는 150m 떨어진 맞은편 차로에서 낯익은 차량을 발견했다. 자주색 모닝. 아내의 승용차였다. 규정 속도 50㎞ 도로에서 박씨는 아내 차량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충돌 1초 전까지 가속 페달을 밟고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박씨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은 금세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로로 진입했다.

차량 속도가 시속 121㎞로 치솟았다. 몸집 큰 SUV 좌측 전면부가 경차의 왼쪽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아내 임씨가 앉은 운전석을 정면으로 강타한 것이다. 임씨는 병원에 후송됐으나 이날 오후 7시 57분쯤 중증외상으로 숨졌다. 이 시각에 의사가 사망 판정을 내렸을 뿐 임씨는 사고 충격으로 현장에서 바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꿎은 피해자도 발생했다. 박씨의 SUV는 아내의 모닝 승용차 뒤를 따르던 쏘나타 승용차도 들이받았다. 쏘나타 운전자 김모(여·47)씨와 동승자 임모(여·54)씨가 골절상 등을 입어 전치 12주의 진단을 받았다.

경찰은 지난해 6월 9일 살인과 일반교통방해치상 등 혐의로 박씨를 검찰에 구속기소 의견으로 송치했다. 당시 경찰은 “도로 특성상 과속할 이유가 많지 않아 과학적인 수사 기법을 동원했다”며 “그 결과 박씨가 살인할 의도로 차량을 과격하게 몰았던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당시 박씨는 “나는 고의적으로 사고를 내지 않았다. 억울하다. 실수로 사고를 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지난해 5월 19일 오후 발생한 전남 해남군 마산면 왕복 2차로 사고 현장./해남소방서

◇재판부 “죽을 줄 알고도 가속 충돌”… 미필적 고의 인정해 살인죄 적용

지난 14일 박씨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왔다. 광주지법 해남지원 형사1부(재판장 조현호)는 이날 살인 등 혐의로 기소된 박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시속 121km의 빠른 속도로 피해자가 피하거나 멈출 겨를도 없이 차량을 충돌했음에도, ‘피해자가 피하지 않아 사고가 났다’면서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며 “피해자 유족도 피고인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다.

다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만나 주지 않아 상실감이 큰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여러 차례 반성문을 제출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말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혐의는 살인과 일반 교통방해 치상, 폭행, 특수협박 4가지다. 이 중 살인죄 적용 여부가 쟁점이었다. 박씨의 변호인은 “피고인의 예상과 달리 피해자가 차량을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진행했다”며 “피고인은 뒤늦게 위험을 느끼고 충돌 직전 급하게 우측으로 핸들을 돌려 피하고자 했으나 충돌을 피하지 못했다. 살해하려는 고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자신의 행위로 피해자가 사망할 것을 알고도 사고를 일으켜 살인에 대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며 “살인의 고의가 있었던 증거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중대형 SUV로 과속해 경차를 충돌할 경우 피해 운전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차량 출동 때 본능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박씨가 아내의 차를 세울 의도였다면 차량 속도를 줄이면서 상대 차량의 진로를 방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가속하면서 중앙선을 침범해 충돌할 때까지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았다고 했다.

또 사고 도로는 박씨가 평소 자주 다니는 편도 1차로 도로인데, 옆에 배수로와 제방이 있어 피해자가 중앙선을 넘어 갑자기 다가오는 차량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박씨가 알고도 사고를 냈으니 살인 의도가 충분하다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흉기 위협 일러스트./조선DB

◇‘‘너 죽고 나 죽자, 목을 따줄까?” 결혼 후 잦은 다툼

박씨는 20대 후반에 10대 후반의 임씨와 결혼했다. 첫째 아들(22)이 지적장애를 앓았다. 결혼 이후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지난해 3월 3일 오후 7시쯤, 아내가 저녁을 차려주지 않자 박씨는 “너 죽고 나 죽자, 목을 따줄까?”라고 소리치며 흉기로 위협하기도 했다. 박씨는 잠자리를 거부하는 아내에게 욕설을 하거나 폭력을 자주 행사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3월 9일 별거했다. 법원은 남편 박씨에게 같은 해 3월 12일부터 5월 11일까지 아내 임씨 거주지와 직장 등에 100m 이내 접근 금지를 명령했다. 전화나 문자 등도 금지했다. 하지만 남편 박씨의 집착은 더 심해졌다.

접근금지 기간에도 택시로 임씨를 미행하거나 ‘문자 폭탄’을 보냈다. 임씨는 지난해 4월 27일 이혼과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박씨는 “이혼 만은 안 된다”며 아내에게 더욱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판부는 “가정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은 피고인의 마음은 인정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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