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왜 여태껏 박인환이 디테일 장인인 줄 몰랐을까

박생강 칼럼니스트 2021. 4. 1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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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레라' 박인환, 노년에 '인생캐'를 갱신하다
박인환 그리고 '나빌레라'가 보여준 명장면 셋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생강의 옆구리tv] tvN 드라마 <나빌레라>는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나빌레라>는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 이후 젊은 시절 꿈인 발레를 시작한 노인 심덕출(박인환)의 삶을 조심스레 살펴간다. 동시에 심덕출, 최해남(나문희) 부부의 가족 서사와 발레리노 이채록(송강)의 서사가 겹쳐지면서 여러 겹의 인간적인 이야기들의 무늬가 만들어진다. 노년의 삶, 가장이 지닌 삶의 무거움, 어쩔 수 없는 이혼, 아버지와 아들, 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 청년세대의 초라한 현실. 이런 것들이 <나빌레라> 무대 위에 하나씩 천천히 얹어진다.

정적이지만 그 안에 격동이 담긴 발레처럼 드라마 역시 극적인 사건들을 품었지만 흐름은 정적이다. 그 때문에 자극적이고 빠른 전개에 익숙한 시청자들까지 품기에는 다소 아쉬움이 있는 건 사실이다. 웹툰의 가독 속도는 독자의 손가락으로 취향에 맞게 조종할 수 있지만, 드라마의 속도는 시청자가 조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빌레라> 웹툰을 사랑하고, 그 웹툰의 감동을 그대로 가져오길 바라는 이들에게 <나빌레라>는 소중한 선물이다. 웹툰이 품은 등장인물들의 휴머니즘적인 메시지와 덕출이 지닌 삶에 대한 열정이 드라마 안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허나 <나빌레라> 웹툰의 독자들도 만화 속 덕출의 캐릭터에 배우 박인환을 대입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KBS <왕룽일가>의 왕룽을 시작으로 KBS <소문난 칠공주>의 나양팔까지 박인환은 가부장적이고 답답한 아버지의 표상 같은 캐릭터를 지녔다. 특유의 딱딱거리는 말투는 캐릭터의 꼬장꼬장함을 더해주었다. 여기에 종종 코믹함을 얹어서 시청자들을 웃겼지만, 박인환은 어쨌든 시청자들에게 신구, 백일섭, 이순재처럼 친숙하고 정겨운 노역의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빌레라>에서 배우 박인환은 심덕출을 통해 뒤늦게 숨겨져 있던 표정을 드러낸다. 누구도 이 단단하고 딱딱한 바위 같은 노배우에게 눈물 젖은 눈과 부드러운 표정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는 발레리노를 꿈꾸는 노인을 코믹하게 묘사하지도 않는다. 의외로 박인환은 섬세한 감성을 가졌지만, 삶의 무게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나이 든 노인의 여린 마음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려낸다.

또한 박인환의 심덕출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툴툴대는 채록(송강)의 매니저 연기 역시 매력적으로 소화해낸다. 평소 다른 드라마에서 보여준 그의 딱딱거리는 말투는 <나빌레라>에서 부드러운 박자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심덕출이 몸으로는 완벽하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꿈꾸는 부드럽고 우아한 발레의 몸동작처럼 말이다.

한편 심덕출이 역시 연기의 대가인 배우 나문희와 만들어내는 호흡도 이 드라마의 백미 중 하나다. 두 베테랑 배우가 연기하니, 평범한 일상의 담백한 연기에서도 달달함과 짠내와 먹먹함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현재까지 박인환이 보여준 그리고 <나빌레라>의 명장면 세 개를 손꼽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5회차 후반부 덕출이 콩쿨 결과를 기다리던 채록이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가는 장면이다. 해남은 집에서 채록을 맞이해 푸짐한 점심상을 차려준다. 그리고 부부는 밥을 먹인 후에 채록을 잠시 방에서 자게 한다. 이후 채록이 일어나자 다시 한 번 저녁식사를 차려준다. 어떠한 자극적인 양념도 없는 일상의 장면이지만, 이 안에서 노부부가 얼마나 채록을 아끼고 격려하고 싶은지 드러난다. 두 배우의 표정과 잔잔한 대사만으로도 그 느낌이 전해지는 명장면이다. 또한 이런 담담한 장면에서 감동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나빌레라>가 품고 있는 특유의 강점이기도하다.

반면 7회 차에서 결혼기념식을 맞아 놀러간 수족관에서 덕출이 길을 잃고, 해남이 남편을 찾고,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채록이 덕출을 찾는 장면은 긴장감이 넘친다. 부부의 놀이터 같은 수족관은, 박인환이 기억을 잃는 시점에서 소외된 공간으로 변해갔다. 박인환은 특별한 유난스러운 감정의 호소 없이도 위기의 인간의 공포를 빼어나게 연기해낸다.

하지만 압도적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빼놓는 장면은 8회 차의 후반부일 것이다. 잊었던 병원 진료를 받고 오던 덕출은 갑자기 공원 한가운데에서 수첩을 떨어뜨린 후 기억을 잃어버린다. 완전한 알츠하이머의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한 인간의 인간이 우르르 무너지는 암흑의 순간을 이 노년의 배우는 소리 없는 슬픔과 공포로 그려낸다.

이후 채록이 등장해 발레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또 의미가 있다. 사실 덕출은 기억을 잃었다가 우연히 발레하는 채록을 보고 기억이 돌아온 경험이 있다. 이 경험 때문에도 그는 발레를 하게 된 것이다. 채록은 우연히 덕출의 수첩을 보았다가, 이 사실을 기억해 그의 앞에서 가장 절실한 감정을 담아 춤을 춘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자가 되었던 덕출은 다시 눈시울에 따뜻한 눈물이 고이면서 기억을 되찾는다. 물론 시청자들의 눈은 어느새 눈물로 퉁퉁 부어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박인환의 심덕출은 원작 웹툰의 심덕출과는 다른 선 굵은 존재감을 갖는다. 그리고 <나빌레라> 속 발레의 꿈을 이뤄가는 덕출처럼, 배우 박인환 역시 그간 브라운관에서는 보여줄 수 없었던 풍성한 감성 연기를 마음껏 펼치면서 '인생캐'를 갱신한다. 이 정도면 tvN에 연기대상이 없어서 아쉬울 정도.

칼럼니스트 박생강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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