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엔 황당한 SF만화라고 욕 먹었지"

글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사진 강윤중 기자 2021. 4. 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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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65년 한 만화가는 상상력을 발휘해 35년 뒤 2000년의 시대상을 그렸다. 놀랍게도 그의 상상은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 그림을 그린 지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는 또 ‘아톰’과 ‘마징가’가 일본만화 캐릭터인지도 잘 모르던 1970년대, 당시 로봇만화의 본산이던 일본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이고 실전적인 로봇 캐릭터 ‘캉타우’를 만들어냈다. 그가 바로 <심술통>, <심술가족> 등 ‘심술 시리즈’ 만화로 유명한 이정문 화백(79)이다. 얼핏 봐선 전혀 다른 영역 같은 명랑만화와 SF로봇만화 모두에서 자신만의 유머와 스토리로 독자들을 웃고 꿈꾸게 만들며 큰 이정표를 남긴 것이다. 4월 12일 경기 이천시에 있는 화실에서 이 화백을 만나 그의 작가 일생을 함께 반추해봤다.

만화가 이정문 화백이 4월 12일 경기 이천시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62년간의 작품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965년에 그린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 그림 하나만으로도 과학 특집호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만화가여서 특별히 만나자고 했다.

“그 그림 덕분에 유명한 대기업에서 새로운 기술개발에 필요한 영감을 달라며 특강 의뢰도 많이 들어와 재미를 봤다. 2015년엔 한국공학한림원이라는 데서 창립기념 행사를 한다며 내 그림을 초청장에 쓰고 나보고 서울대에 와서 강의도 해달라길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갔지. 그런데 알고 보니 국내 대기업 총수들도 회원으로 있는 대단한 단체더라고(웃음). 지금 알려진 그림의 원화는 한 단행본에 실렸던 건데 워낙 오래전 그림이라 원화는 없어져 보기 좋게 다시 그린 것이다. 당시 그릴 때는 내가 전부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미래에 어떤 기술이 만들어진다는 기사를 읽으면 그와 연관된 나만의 상상을 곁들여 이렇게도 되지 않을까 하며 덧붙인 것들이 많다.”

-이후에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상상해 봤나.

“그림이 유명해져 여러 잡지나 기업에서 미래를 전망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고, 나 스스로도 흥미가 있어 몇편 그려둔 게 있다. 또 한번은 5G 시대가 열린다며 SK텔레콤에서 화실에도 오고 자기네 체험관에도 불러 광고 촬영을 한 적도 있다. 체험관에서 미래기술도 체험해 보니 내가 그때까지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첨단기술이 발전한 세상이 오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돌아보니 화실이 광고를 찍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화백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술통과 캉타우 캐릭터의 대형 모형과 동료 작가들이 남긴 그림과 사인이 인상적이다.

“캐릭터 모형은 예전에 전시회를 열 때 주최측이 만들었다가 전시 끝난 뒤엔 버린다기에 들고 온 거다. (벽 한 면을 가리키며) 저 벽에 있는 그림과 사인은 화실을 열 때 동료 작가들이 와서 그려줬다. 여기 작고한 고우영 작가 그림도 있고, 이 ‘강가딘’ 캐릭터는 얼마 전 작고한 김삼 작가가 그렸던 것이고. 예전엔 여기 모여 밤새 떠들며 신나게 놀다 가곤 했어.”

-미래엔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것이란 상상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다.

“1965년은 군 복무 마치고 제대한 해였다. 그때는 흑백TV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여서 열 집에 한대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다. 인기 있던 프로레슬링 김일 선수 경기를 보고 싶어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편리하게 누구나 자기 손에 소형 TV를 들고 다니는 시대도 오겠지 하면서 그림에 넣었지. 또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는데 그때 군인들이 무전기를 들고 오가며 통신하던 모습을 보고 TV 화면을 우표만 하게 만들어 무전기에 붙여 통신하면 좋겠다 하는 당시로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것도 반영했다. 전쟁통이라 길거리 지나가는 전차의 무한궤도를 보고선 저걸 뜯어서 쫙 깔면 움직이는 도로(무빙워크)가 될 것 아니냐 하기도 하고. 머리 좋은 사람들은 그걸 결국 만들어내더라고.”

-그런 상상력이 독창적인 SF만화의 원동력이 됐겠다.

“어릴 적 집에서 굴러다니던 <서유기> 동화책을 보면서 손오공이 서울 밤하늘 위 쏟아질 것 같은 은하수 사이를 날아다니는 모습을 꿈꿨다. 나도 손오공처럼 하늘에 올라가고 싶다고. 그 생각이 <UFO에서 온 소년 루카>나 <설인 알파칸> 그릴 때 들어갔다. 알파칸을 히말라야에 사는 설인으로 설정했는데 하늘을 날기 위해 분사통을 메고 나는 모습을 그렸거든. 한데 황당무계한 얘기를 그려놨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었어.”

-왜 욕을 들었는지 궁금하다.

“그 시절은 매년 5월만 되면 만화를 초토화시키던 시대였어. 애들한테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한다고. 영화에선 ‘007’ 시리즈에 숀 코너리가 나와 분사통 달고 날아다녀도 가만 놔뒀는데 만화에서 그리면 욕을 먹지. 하다못해 제목의 알파칸을 보고 한국적인 이름도 많은데 왜 그런 이름 쓰냐, ‘쿵’ 같은 효과음을 표현한 글자도 시각에 나쁘니 작게 써라, 명랑만화에서 누나랑 남동생이 같이 잠을 자는 장면도 트집 잡을 정도야. 만화가 밥이었어. 다 찍어낸 단행본 가지고 지적받으면 폐기할 수밖에 없으니 속 터져. 작가한테 맡겨둘 생각은 않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한국 SF만화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인 <철인 캉타우>를 그려냈다.

“<알파칸> 6년 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캉타우>를 그렸어. 로봇만화로 왜 갔냐면, 1975년 당시는 일본에서 온 <아톰>이 흑백TV로 방영돼 인기 끌던 시절이야. 아톰이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걸 보고는 ‘재밌네’ 하고 지나갔지.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시공관(현재 서울시의회) 극장에서 이따만한 <마징가> 극장판을 컬러로 상영해. 특히 어디서 놀랐냐면 <마징가> 보러온 애들이 상영하기 전부터 주제가를 떼창으로 부르는 거야. 그때만 해도 ‘반일’이 국시(國是)처럼 여겨지던 시절인데 마징가가 일본 건지도 모르고 인기 끄는 걸 보고 이거 안 되겠다 싶었지.”

이정문 화백의 만화 <철인 캉타우>에서 로봇 캉타우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 이정문 화백 제공


-철저히 반일감정으로 그려서 그런지 캉타우는 일본만화의 로봇과 전혀 닮지 않았다.

“캉타우는 순수하게 독창적으로 만들자 다짐하고 그렸어. 내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이상하게 반일감정이 있었어. 그래서 일본만화의 요소는 철저히 배제하고 캉타우의 무기는 조선의 철퇴로, 거기에 청정에너지 번개를 모아 에너지를 쓰면 원전도 필요 없다는 식이었지. 지구를 망친 주범은 석유 찌꺼기니까 지구환경을 살리자는 의미로 외계인들의 첫 행동도 유전 때려부수는 장면으로 넣었어.”

-환경에 대한 인식이 약하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엄청 앞서나갔다. 그 때문인지 지구인 캐릭터는 부차적이고 외계인들 간의 대결구도가 주가 되는 이야기 구조도 독창적이었다.

“지구는 지구인의 것이 아니라고 하려니 ‘안 되겠다 지구인들을 교육하는 구도로 가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거다. 그때는 대통령한테 환경보호 이야기를 꺼내도 ‘그 정도는 참아라’ 하는 대답을 듣던 시절이라. 일본에선 이타이이타이병처럼 공해문제가 심각했는데 한국에도 곧 그런 현상이 들어올 것 같아 경고하는 의미를 담았다.”

-최근 <철인 캉타우>가 첫 연재 후 46년 만에 크라우드펀딩을 받아 복간되기도 했는데 전에 밝혔던 2부 연재 계획은 없나.

“출판업자한테서 500부만 찍으면 복간본 손익분기점은 넘긴다더라. 난 처음엔 반신반의했지. 이렇게 오래된 만화가 팔리겠나 싶어서 말이다. 결국 500부 전부 일일이 다 사인을 해서 나갔다. 전부터 공언한 ‘캉타우 2부’는 결국 못 그렸어. 작가는 마감이 없으면 절대 안 그리거든. 대신 지금은 휴재 중이지만 웹툰에서 양경일 작가가 <캉타우> 리메이크를 그리고 있다. 리메이크한다고 왔을 때 캉타우의 얼굴과 가슴팍, 철퇴만은 바꾸지 말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림의 선이나 요즘 정서는 내가 못 따라가잖아. 양 작가가 실력이 있어서 잘 그리더라.”

-데뷔작이 <심술첨지>였고, 이후에도 꾸준히 ‘심술 시리즈’를 그려 <철인 캉타우>는 대필시켰다는 의혹도 받았다.

“나는 자부심이 있다. 스토리나 그림 어느 것도 다른 작가의 것을 따오지 않았고, 대필시킬 문하생 자체가 없었다. 아내가 만화에 들어가는 먹칠만 도와줬을 뿐이다. 그러니 <캉타우>를 3년쯤 하니 너무 힘들더라. 명랑만화는 쉽지만 리얼한 그림체는 품이 많이 들어도 원고료는 같다. 혼자 지우개질까지 다 하고 원고를 편집국까지 직접 갔다주던 때라 명랑만화에 주력했다.”

-현재까지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과 캐릭터로는 <심술통>과 동명의 주인공이 꼽힌다.

“<심술통> 연재 시작이 1986년이었다. 처음에는 <심술첨지>를 이어서 하려다가 당시 새롭게 창간한 스포츠지에 싣는 만화다 보니 새로운 주인공으로 하자고 제안하길래 <심술통>을 그렸다. 창간호 나오기 전에 그쪽 편집국에 초고를 갖고 갔는데 심술통의 턱을 보더니 국장이 나한테 청와대를 가리키며 ‘모르냐’고 그러더라고. 그 말만 듣고 알 리가 있나. 5공 당시 영부인이 심술통처럼 턱이 튀어나왔으니까 그때 국장은 ‘신문 나오기 전에 망하는 꼴 봐야겠냐’며 고쳐달라고 한 거였어. 그래서 나는 ‘심술은 여기서 나온다’며 안 바꿨지. 대신 원래 제목 <심술통이>에서 ‘이’를 뺐어. 1959년 데뷔할 때부터 심술 캐릭터의 특징이 시종일관 턱이었으니 그건 바꿀 수 없지.”

-심술통 캐릭터로 카톡 이모티콘도 만들었다. 미국처럼 캐릭터를 후임 작가에게 전승시킬 생각은 없나.

“심술통 이모티콘은 캐릭터 원본 그림만 그려주고 움직임이나 소리를 개발하는 쪽에서 알아서 넣어 상품화시키라고 넘긴 것뿐이다. 캐릭터를 전승하는 건 미국 디즈니의 미키마우스처럼 해보잔 얘긴데, 이제는 국내에도 분업화가 됐으니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 세대 만화가는 배경이 전혀 다르다. 우리에겐 만화 창작이라고 하면 자기 혼자 가는 길이었다. 또 이제 와서 심술 만화 그린다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나. 종이 만화는 우리 세대와 함께 끝났다. 대신 우리 웹툰이 솜씨가 있어 세계를 제패하고 있으니 더 바람직하다.”

글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사진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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