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봄? 회생법원선 한달 1000명씩 파산합니다"

김신영 기자 2021. 4. 20.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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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기 서울회생법원 파산 접수 2600건
샐러리맨 파산, 처음으로 사업 파산 앞서
파산 법정이 열리는 서울회생법원의 모습. /고운호 기자

지난 14일 찾아간 서울 서초동 서울회생법원 4층 법정엔 파산 절차를 밟으려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경제의 중환자실’이라 불리는 회생법원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빚을 갚을 수 없게 된 이들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빚 탕감을 호소하러 오는 곳이다. 정기적인 소득이 있으면 개인회생을, 그마저도 없으면 파산 절차를 밟는다.

파산 법정으로 들어오는 이 중엔 시선을 떨군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서울회생법원 김주미 공보판사는 “코로나 예방을 위해 법원은 비대면 절차도 함께 진행 중이기 때문에 실제 진행 중인 파산 재판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설명했다.

이날 파산 법정에선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남은 재산이 더 있지 않으냐. 왜 나를 피해 다니느냐”고 따지는 채권자에게 한 50대 남성은 “지금 가족과도 떨어져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 너무 죄송해서 연락도 못 드리고…”라며 울먹였다. 이날 3시간 동안 진행된 파산 절차만 200건이 넘었다. 재판을 진행한 이동식 부장판사는 파산 선고를 받은 채무자에게 “파산 결정의 배경에는 채권자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잊지 말고, 아무쪼록 계획을 잘 세워 재기에 성공하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빚을 못 갚을 위기에 놓인 자영업자와 실직자들의 개인 파산 신청이 크게 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경제가 빠르고 강하게 회복되고 있다. 봄이 빨라질 것”이라고 했지만 파산법원엔 매월 1000건이 넘는 개인 파산이 접수되고 있다. 올해 1분기 서울회생법원의 개인 파산 접수 건수는 2622건으로 지난해(2364건)보다 10%, 코로나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19%나 늘었다. 3월에만 1009건이 접수됐다. 서경환 서울회생법원장은 “파산 접수가 매월 1000건 넘게 들어오는 때가 거의 없었는데 최근 1년간은 네 번이나 1000건을 넘었다”면서 “버티다 버티다 파산이란 마지막 구제처로 들어서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했다. 파산 접수를 한 사람 중에 90% 이상은 파산 선고를 받고 파산 절차에 돌입한다.

◇“버티다 왔습니다”... 20% 늘어난 개인파산

김모(63)씨는 슬리퍼 도매상을 10년 넘게 해왔다. 괜찮은 벌이였다. 코로나라는 재앙이 닥치기 전까진 그랬다. 지난해 코로나 방역을 위한 거리 두기로 재택 수업·근무가 늘자 매출은 하루아침에 반 토막 났다. 거래처에 줘야 할 자재 구입비 6억원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결국 올 초 서울회생법원에 개인 파산을 신청했다.

30대 이모씨는 대출받아 차린 자동차 정비소를 지난해 코로나 사태로 폐업했다. 피아노 레슨으로 생계를 꾸렸던 50대 여성은 코로나 탓에 레슨이 끊겼다. 이 세 명은 이달 초 같은 날 서울회생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

/고운호 기자

30년 동안 식당을 하던 67세 A씨도 지난해 11월 가게를 접고, 지난달 파산 선고를 받았다. 운영하던 고깃집이 꽤 잘돼 지난해 초 빚을 내 대학 정문 앞으로 가게를 확장·이사한 것이 덫이 됐다. 바로 코로나가 닥쳤고 학교 앞 거리는 비었다. 그는 “‘아이들(학생 손님)’ 구경도 못 했다”고 했다. 반년 동안 손님을 기다리며 버티다 포기하고 문을 닫았다.

그는 집까지 팔아서 갚을 수 있는 돈은 일단 갚고 월세 30만원짜리 원룸에서 아내와 살고 있다. 1000만원 정도 남은 카드빚은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서 파산을 신청했다. “파산 선고를 받았더니 경비로도 취업이 안 됩디다. 법이 그렇답디다. 사는 게 팍팍하냐고요? 팍팍하긴 무슨… 죽을 지경입니다. 경기 좋다는 분들, 회생법원에 한번 가보세요.”

◇자영업자 빚,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중

아직 파산까지는 가지 않은 많은 자영업자 중엔 버는 돈보다 빚을 더 많이 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잠재적 파산자’가 우리 사회에서 불어나고 있다. 한국은행 분석 결과 지난해 4분기 자영업자의 대출은 전년보다 17% 늘어난 반면 매출은 5% 줄었다. 장사를 하면 할수록 빚만 불어나는 중이다.

한은에 따르면, 자영업자들은 코로나로 매출이 줄어 빚을 늘릴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봉착해 있다. 소득 대비 빚 상환 부담을 나타내는 지표인 DSR(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 비율)을 한은이 분석했더니 자영업자의 DSR이 지난해 3월 말 37.1%에서 12월 말 38.3%로 올라갔다. DSR이 높으면 그만큼 빚 갚기가 어려운 상황이란 뜻이다.

작년 3월부터 시행된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원리금 상환 유예 조치가 없었다면 DSR은 42.8%로 더 높아졌을 것으로 한은은 추산했다. 업종별로는 미용실 등 개인 서비스(원리금 유예 없을 경우 DSR 64.7%), PC방·노래방 등 여가업(60.9%) 등의 빚 부담이 특히 컸다. 백주선 한국파산변호사회 회장은 “생활비조차 없어 폐업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이들에겐 자영업자 대출마저도 그림의 떡”이라고 말했다.

◇늘어난 ‘샐러리맨 파산’, 처음으로 자영업자 추월

자영업자만 회생법원으로 몰려드는 건 아니다. 다니던 회사나 일하던 가게가 사라지고, 어쩔 수 없는 감원으로 일자리를 잃은 직장인들도 버티다 못해 회생법원으로 향한다. 40대 남성 최모씨는 공항에서 장기계약직으로 일했지만 코로나로 공항 이용자가 급감하며 인원 감축 대상이 됐다. 재취업을 시도했지만 공항·여행사 등 관련 업종은 대부분 인력을 줄인 터였다. 그는 대부 업체에서 대출받아 버티다 취업을 포기하고 올해 초 파산 신청을 했고, 이달 초 파산 선고를 받았다.

50대 문모씨는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재봉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코로나 이후 일감이 끊긴 직장을 그만두는 바람에 파산 신청을 했다. 회생법원 최유경 판사는 “파산 사유를 물으면 코로나로 일하던 가게가 문을 닫았다거나 다니던 직장이 감원하는 바람에 소득이 줄었다는 이들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고 했다.

회생법원 분석 결과 지난해 파산 접수자 중 사유(복수 응답 가능)를 ‘실직 또는 근로소득 감소’라 밝힌 비율이 49%로 2년 전(35%)보다 크게 늘었다. ‘사업 실패 또는 사업소득 감소’로 인한 파산을 통계 작성(2018년) 후 처음으로 앞질렀다. 직장인 파산자가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백주선 회장은 “경제 상황이 악화해 직장을 잃거나 소득이 크게 줄어든 이가 많아 직장인 출신의 파산 신청이 자영업자를 이례적으로 넘어섰다. 코로나가 자영업자뿐 아니라 근로소득자의 ‘지갑’에도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키워드: 샐러리맨 파산

개인파산은 통상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자영업자들이 많이 신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직장인도 일자리를 잃거나 급여가 크게 줄어 빚을 갚기 어렵게 되면 파산 신청을 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샐러리맨 파산’이다. 서울회생법원은 2018년부터 관련 통계를 내고 있는데, 지난해 처음으로 샐러리맨 파산이 사업자 파산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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