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피해자는 가해자의 '합의 스토킹'에 다시 시달린다

최윤아 2021. 4.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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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가족 동원 '합의해 달라' 집요한 공세
'반의사불벌' 스토킹처벌법 시행되면 더 심해질수도
게티이미지뱅크

“방금 어떤 남자가 네 사무실로 커피 들고 들어갔는데 누구냐.”

김아무개씨는 헤어진 남자친구로부터 계속 이런 문자를 받았다. 수시로 자신이 주변에 있다는 걸 암시하는 문자를 보냈던 그는 급기야 김씨 집에 무단침입해 김씨를 성폭행했다. 김씨 고소로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수감된 가해자 대신 가해자 가족들이 김씨 집으로 선물을 보내며 끈질기게 합의를 종용했다. 가족까지 동원한 가해자의 집요한 합의 공세에 지친 김씨는 처벌불원서에 서명했고, 가해자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씨는 풀려난 가해자가 언제 다시 자신을 찾아올지 몰라 요즘도 불안에 떨고 있다.

가해자 쪽이 이토록 합의에 매달리는 건 형량을 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를 형량을 깎아주는 주요 양형 참작 사유로 두기 때문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작성한 ‘2020년 양형기준’을 보면, 성범죄 양형 감경요소에 ‘처벌불원’이 포함돼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합의를 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재판부에 알리면 형량을 낮춰준다는 얘기다. 일반적 양형 감경요소 가운데 하나지만, 스토킹에 이어 발생한 성범죄에서는 재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스토킹은 성범죄를 예고하는 ‘전조 범죄’로 불릴 정도로 많은 경우 성범죄를 동반하는데, 법원이 합의 여부를 감경요소로 삼으면 가해자가 무거운 형을 피하기 위해 피해자에게 필사적으로 연락하게 된다. 안 그래도 가해자의 접근에 공포를 느끼는 피해자는 더 극심한 고통 속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가해자 쪽의 끈질긴 합의 종용에 지치거나 보복이 두려워 처벌불원서에 서명하면, 가해자가 약한 처벌을 받고 풀려나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어려워진다. 합의를 안 해도, 해도 고통받는 셈이다.

법조계와 여성계에서는 이런 양형 관행을 재고해야 한다는 요구가 꾸준히 있어왔다. 장윤미 대한여성변호사회 공보이사(변호사)는 “가해자가 가족(특히 여동생이나 누나)을 동원해 선물을 건네고 연락을 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비록 합의는 했지만 (가해자의) 형을 집행유예까지로 낮추지는 말아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법원은 합의 여부를 양형에 얼마나,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직 검사 3명이 지난 달 함께 펴낸 책 <여자, 사람, 검사>에서 김은수(필명) 검사는 이렇게 썼다.

“법원이 피해자를 직접 보호해줄 것도 아니면서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무겁게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신호를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탓할 빌미를 제공해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토킹 행위와 관련된 양형 참작 사유로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지 않고 있는지 여부, 더 이상 피해자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 등이 더 중요한 양형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는 10월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면 ‘합의 스토킹’ 문제는 더 심각해 질 수 있다. 스토킹처벌법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서는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다. 이 경우 처벌불원서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처벌불원서를 양형 때 참작하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처벌불원서가 스토킹 범죄 수사를 멈추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스토킹 범죄에서 합의 종용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고통이 되는지 알기 때문에 이번에 입법된 스토킹처벌법에서도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빼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국가는 여전히 스토킹 범죄를 피해자가 용서하면 되는 일로, 국가가 나설 필요가 없는 일로 보고 있다”고 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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