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이재용 사면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2021. 4. 2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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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국이 일본 반도체산업의 콧대를 꺾은 건 1986년 체결된 미·일 반도체 협정을 통해서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인텔과 마이크론, 모토로라를 앞세워 반도체산업을 호령했던 미국은 NEC, 도시바, 히타치를 앞세운 일본의 저가 공세에 밀려 치명타를 입었다. 결국 미국은 덤핑 혐의에 따른 보복 관세로 일본을 꺾었다. 일본이 굴욕적으로 서명한 반도체 협정에는 미국에 생산원가를 공개하고, 일본 내 미국 반도체 업체의 점유율을 20%까지 높이겠다는 약속이 담겼다. 미국은 한때 한국도 같은 방법으로 옭아매려 했다. 1992년 미국 마이크론이 삼성전자와 현대, 금성 등 한국 반도체 3사를 덤핑 혐의로 제소한 것이다. 다행히 한국 반도체산업을 키우는 것이 일본을 견제하고,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미국 정부의 판단으로 국내 기업들은 화를 면했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반도체산업 부흥을 중국 봉쇄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미국이 수십년 전 행보를 반복할 것이라 예단하고 싶진 않다. 다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일본에 그랬던 것처럼 동맹국인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뒤흔들 가능성은 있다. 삼성전자의 미국 내 투자 확대 압박이 거세진다면 경제 논리가 아닌 정치·외교 논리에 따라 투자결정이 이뤄질 수 있고 이는 삼성전자에 부담이다. 중국 시안에 대규모 반도체공장 2곳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중국의 시선도 따가울 것이다.

반도체 굴기를 향한 중국의 집념은 리커창 총리가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 업무 보고에서 “10년간 단 하나의 칼을 가는 심정으로 매진하겠다”며 과학기술 집중육성 의지를 표현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매년 수조위안 규모의 반도체를 수입하는 중국은 특히 삼성전자가 1위인 메모리반도체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중 간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은 반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산업이 전례없는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국면인 건 맞다. 지난 1월 국정농단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재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주장이 경제단체, 일부 학계 및 정치권에서 제기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런 상황이 깔려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부회장 사면이 ‘K반도체’와 삼성전자에 최선일지에 대해선 아직 공감대가 부족하다.

사면이 필요하다는 재계 관계자의 주장은 이렇다. “이 부회장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고 있죠. 예컨대 빌 게이츠나 손정의 같은 사람들이 전문경영인을 쉽게 만나 주겠습니까. 어떤 협상파트너들은 전문경영인이 나오면 ‘임기가 얼마나 남은 사람인가’란 생각부터 할 텐데 굵직한 수주가 가능할까요. 수십조원 규모의 대규모 투자 계획이나 인수·합병은 오너의 결단이 없으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실패 시 누가 책임을 지나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옥중 경영도 어렵잖아요. 여러 채널로 의견도 듣고 해야 하는데 경영진이 건네준 페이퍼만 갖고 감옥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다음은 사면에 반대하는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의 얘기다. “삼성전자는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의사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봅니다. 과연 이 부회장이 있고 없고에 따라 대응이 얼마나 달라질지 의문입니다. 기본적으로 미·중 갈등은 기업 차원의 대응에 한계가 있는 것이죠. 이 부회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을 만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2017년 3월) 삼성전자가 미국 전자장비기업 하만을 인수한 것도 이 부회장 부재 시 이뤄진 거 아닙니까. 그가 사면된다면 재벌 총수들은 역시 치외법권 지대에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그에 따른 사회적 폐해는 매우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회장 사면이 쉽게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점은 분명하며 최종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판단에 달려 있다. 사면한다면 경제살리기라는 미명으로 재벌 총수들에게 사면 특혜를 부여했던 역대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된다. 물론 이 같은 부담을 떨쳐버리고 엄중한 현재 상황을 감안해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전격적으로 사면을 단행할 수도 있다.

이 부회장이 최근 충수염 수술을 받았고, 수감 생활은 ‘자연인 이재용’에게도 무척 힘들 것임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바라는 사람들은 이 부회장 사면 시 법 앞의 평등이 다시 한번 무너졌다고 느끼지 않을까.

오관철 경제에디터 겸 산업부장 ok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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