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이기자 바로 '박근혜 사면론', 국민의힘 체질인가

김종성 입력 2021. 4. 23. 15: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국민의힘 곳곳서 나오는 '이명박·박근혜' 사면을 보며

[김종성 기자]

4·7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한 국민의힘이, 4월 달력을 다 넘기기도 전에 퇴행 조짐을 보이는 듯하다. 수구보수나 극우적 목소리가 살짝살짝 삐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비상대책위원회 출범 당시 "보수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며 탈이념을 강조했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선거와 함께 홀연히 물러났다. 김종인 위원장과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를 중심으로 당내 분위기를 주도했던 중도정치 노선도 어디론가 실종된 듯하다.

지금 국민의힘에서 나오는 것은 '박근혜 탄핵이 잘못됐다' '사면해달라' 같은 수구보수 혹은 극우적 목소리다. 20일에는 서병수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과연 탄핵될 만큼 위법한 짓을 저질렀느냐?"라고 발언했다.

그뿐인가.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에서는 박형준 부산시장이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을 거론했고, 오세훈 서울시장이 "저 역시 같은 건의를 드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가세하는 일이 있었다. 잠깐이나마 중도 노선에 힘입어 당선된 오세훈 시장이 어느새 극우적 주장으로 회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오세훈 서울시장(오른쪽), 박형준 부산시장(왼쪽)과 오찬 간담회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작년 21대 총선 참패 이후로 보수 정당은 중도를 표방하는 김종인 체제에 몸을 맡겼다. 이것이 코로나19로 인한 민심 동요, 부동산 개혁의 역풍, 민주당의 지지부진 등과 더불어 국민의힘의 보궐선거 승리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랬던 중도 노선이 불과 1년도 안 돼 탈색되고 있다. 수구보수나 극우적 성향을 잠시 억눌렀던 기제가 보궐선거 종료와 더불어 급속히 지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진통제 약발이 떨어지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때 그 시절' 정권 교체의 기억

상황이 다소 다르긴 하지만, 1997년 대선 이후의 보수 정당은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했다. 쿠데타가 아닌 선거에 의해 정권을 내주는 초유의 상황에 마주한 것이다.

1987년 및 1992년 대선을 통한 정권 교체도 있었지만, 그것은 '세력간 교체'가 아니라 '세력 내 교체'였다. 1997년 이전까지 '세력간 정권교체'는 시민혁명의 결과로(이승만 몰락), 군사정변의 결과로(장면 몰락), 암살의 결과로(박정희 몰락)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히지 않는 한, 그것은 요원해 보였다.

그랬던 것이 1997년에 일어났다는 것은 국민과 민주 정당의 역량이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수 정당의 역량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투표 이전의 부정선거나 투표 이후의 공권력 발동 등을 통해서라도 선거 결과를 뒤엎으려 했을 보수 정당이, 1997년 대선 결과를 말없이 받아들인 것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여기다 대선 직전에 'IMF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경제 재앙을 초래한 일로 인해 차가운 시선까지 받고 있었다. 이래저래 보수 정당의 위기가 심각한 때였다.

그런데 이 시기 보수 정당은 의외로 강인한 생명력을 발휘했다. 대선 직전인 그해 11월 21일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변신한 보수 정당은 2012년 2월 13일 새누리당으로 개명될 때까지 근 15년간이나 동일한 당명을 유지했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17년간 존속한 민주공화당(공화당)에 버금가는 생명력이었다.

1980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공화당과 달리, 한나라당의 DNA는 새누리당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보면 한나라당의 생명력이 공화당보다 질겼다고 볼 수도 있다. 공화당처럼 강력한 권력을 갖지는 못했지만, 그런 권력 없이도 15년간이나 장수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한나라당이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1997년 대선 패배와 2000년 4.13 총선 사이의 당 쇄신 작업과 무관치 않다. 이 시기의 체질 수술이 보수 정당의 수명 연장에 기여했던 것이다.

1999년 4월 15일자 <한겨레> 기사 '이회창 총재 제2창당 선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나라당을 이끄는 이회창 그룹은 제2창당 수준의 혁신 작업을 목표로 했다. 이때 이들이 내건 기치 중 하나는 환골탈태였다. 이것은 당내 수구세력의 배격을 겨냥한 것이었다.

수구세력 배격은 한나라당으로 당명이 바뀌기 직전부터 추진됐다. 이 점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기반을 둔 민정계의 김윤환 선거대책위원장이 보여준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1997년 10월 30일자 <매일경제> '주류측'은 "김 위원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비주류측의 '수구세력 배격' 주장에 대해 '5·6공 세력이 같이 만든 게 문민정부'라며 '나를 수구세력으로 몰아붙이면 문민정부의 정통성은 어디에 있느냐'고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 회고록 출간한 이회창 전 총재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자료사진)
ⓒ 남소연
 
이같은 수구 배격 움직임은, 2000년 16대 총선 공천 과정에서 구세력이 대거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회창 회고록> 제2권은 "계파 보스인 대구·경북의 김윤환 고문과 구 민주당계의 이기택 고문을 지역구 공천에서 배제했고, 당내 5선 이상 의원 중에서는 김영구, 양정규, 박관용 의원 등 세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제했다"고 설명한다.

회고록은 "그밖에도 주류·비주류와 상관없이 다수의 현역 의원들이 공천에서 탈락"했다며 "신진인 30대의 386세대 중 16명을 새롭게 공천한 것도 특색이었다"고 말한다. 이때 발탁된 인물들이 2006년·2010년과 이번에 서울시장이 된 오세훈, 이번에 부산시장에 출마한 김영춘 그리고 2014년에 제주지사가 된 원희룡 등이다.

공천을 통한 '평화적 숙청'은, 한나라당이 인적 청산을 통해 체질을 일정 수준 개선하고 수구보수 이미지를 덜어내면서, 신진 세력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는 한나라당이 2004년 이후 뉴라이트 지식인들과 힘을 합쳐 2007년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 데도 기여했다. 물론 12·12 및 5·17 쿠데타로 일어선 신군부 정권 후예라는 DNA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수구보수 이미지를 약화시킨 것이 2007년 대선 승리로 이어진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쇄신' 이미지 가리는 사면론

지금의 국민의힘도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런 길을 갈 것이다. 수구보수 이미지를 덜어내는 일을 희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은, 4.7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중도의 마스크를 벗고 극우 스피커에 입을 갖다 대는 모습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정당의 모양새랄까.

1997년 이후의 한나라당은 수구보수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이회창 그룹이 비교적 강력한 당권을 확보했다. 김종인 체제처럼 '비대위' 딱지가 붙은 지도부가 아니라 전당대회의 신임을 받은 지도부가 당 쇄신을 이끌었다. 이것이 신진 인물을 수용하고 민주계(김영삼계)·민정계를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에 더해, 김대중 정권이 정계개편을 목적으로 구여권을 겨냥한 사정 작업을 벌인 것도 결과적으로 이회창 그룹을 도왔다. 김대중 정권이 결과적으로 이회창 그룹을 돕는 일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정권이 단독 정권이 아니라 공동 정권이었기 때문인 측면도 있다.

1997년 대선에 승리한 DJP 연대(김대중+김종필)는 제도권 민주화운동 세력과 구군부 세력의 연합체다. 구군부 세력은 5.16 쿠데타에 기반을 뒀다. 이들은 12.12쿠데타로 일어선 신군부로 인해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때 맺힌 구군부의 한은 공동정권 수립 이후의 김대중 정권이 한나라당 내의 신군부 세력을 집중 겨냥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이것이 한나라당이 수구보수 이미지를 덜어내는 데 결과적으로 기여했다.

1997년 대선 이후의 보수 정당을 도운 위와 같은 요인들이, 2016년 촛불 이후의 보수 정당 앞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동일한 요인은 물론이고 유사한 요인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4.7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가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극우나 수구보수를 제어할 중도 성향의 강력한 지도부가 들어서기 힘든 보수 정당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수구보수나 극우를 제어할 강력한 지도부가 들어서기 힘든 것은, 이 당이 체질적으로 수구보수나 극우에 가깝기 때문은 아닐까. 마음으로는 극우와 결별하고 싶으면서도 몸은 자꾸 그리로 가는 것은, 그런 체질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강력한 당권을 갖지 못한 김종인 위원장은 과거 보수란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하도록 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것을 몸 안에서까지 지우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수구보수 본능이 여전히 살아 있으므로 언제라도 입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게 국민의힘의 현실이다. 보궐선거 뒤 수구보수 본성이 다시 표출되는 데에, '달력 한 장 넘길 시간'마저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