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의 백신 사재기" 정상회담 앞두고 바이든 때린 文, 왜

정진우 2021. 4. 2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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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겨냥한 '자국 우선주의' 비판
5대 백신 중 4개는 미국 개발 백신
백신 기근 우려 속 '여론 다지기'
'백신 스와프' 무산 가능성 고려했나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미국을 겨냥한 듯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내놨다. [연합뉴스]

“전 세계적인 백신 생산 부족,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대국의 백신 사재기.”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코로나19 백신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요소를 이같이 꼽았다.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은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필요한데도 국제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다. 백신 생산량 자체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뿐 아니라 백신 확보에서 우위를 점한 국가들의 이기심이 백신 부족 사태를 심화시킨다는 취지였다. 문 대통령은 또 “여유가 있을 때는 모든 나라가 한 목소리로 연대와 협력을 말했지만 자국의 사정이 급해지자 연합도 국제 공조도 모두 뒷전이 되어 국경 봉쇄와 백신 수출 통제, 사재기 등으로 각자도생에 나서고 있다”며 세계 각국의 백신 정책을 재차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특정 국가를 거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 언급이 의미심장한 건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 당장 백신 여유분이 있더라도 변이 등에 대비해 우선 국내 접종에 집중하겠다는 원칙을 지속적으로 밝히고 있어서다. 또 미국은 주요 5대 백신(아스트라제네카·화이자·모더나·얀센·노바백스) 중 아스트라제네카(영국)를 제외한 4개 백신의 개발국이다. ‘백신 개발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실상 미국을 겨냥한 것이나 마찬가지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백신 스와프 요청에 美 "물량 부족"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21일 한국과의 백신 스와프와 관련 "지금은 백신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다"며 우회적인 거절의 뜻을 밝혔다. [AFP=연합뉴스]

실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지난 20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미국과 '백신 스와프'를 진지하게 협의중이라고 밝혔지만, 미국은 이를 사실상 거절했다. 직후인 지난 21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은 백신을 (타국에) 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네드 프라이스 미 국무부 대변인 역시 같은날 “국내 백신 접종 노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재확인하며, 한국의 백신 스와프 구상은 사실상 물건너간 셈이 됐다.

사실 미국에선 외국인까지 접종이 가능할 정도로 백신 수급 상황이 원활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충분치 않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오는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코로나19 독립'을 선언하는 게 바이든 행정부가 내부적으로 설정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이를 백신 강대국의 이기심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 특히 '자국 우선주의'라는 표현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미국우선주의)'를 연상시킨다.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로 망가진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복원하겠다는 게 바이든 대통령이 가장 우선시하는 국정 운영 방향이란 점을 고려하면, 외교적으로 예민한 표현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비판한 것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백신 스와프와 관련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한 선제적인 메시지라는 분석도 나온다. [연합뉴스]

특히 문 대통령은 5월 말 바이든 대통령과의 대면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갑작스레 바이든 행정부를 저격하는 발언을 내놓은 것은 백신 부족 사태를 우려하는 여론을 의식한 국내 정치용 메시지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문 대통령은 이날 수보회의에서 “냉엄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고 그럴 때일수록 우리도 내부적으로 단합하여 지혜롭게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발언을 남겼다. 지금의 백신 위기가 외부적 요인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내적으로 힘을 합쳐 이겨내자는 취지로 읽힌다.


한·미 정상회담 앞두고 바이든 저격, 왜?
외교가에선 문 대통령의 발언 수위나 시기가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코로나19 대응과 북핵 문제, 미·중 간 갈등 사안에서 한국의 입장 등 국익과 직결되는 사안이 의제로 오를 텐데 이를 앞두고 굳이 미국을 자극해서 얻는 실익이 무엇인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도 최근 미국의 자국민 우선 백신 정책을 비판, 공교롭게도 문 대통령이 유사한 메시지를 발신한 게 됐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26일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바이든 행정부가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는 진찬룽(金燦榮) 중국 런민대 교수의 발언을 보도하며 미국의 백신 정책을 비판했다.

일각에선 문 대통령의 발언이 이번 방미에서 백신을 추가 확보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비한 선제적인 여론 다지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백신 확보에 실패하더라도 원인은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때문이라는 방어논리를 선제적으로 제시한 것이 될 수 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학과 교수는 “코로나19 초유의 상황에서 정부가 자국민을 위한 충분한 백신 물량 확보를 이유로 외국을 지원하는 데 소극적인 것을 ‘자국 우선주의’라고 비판만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오히려 이같은 메시지는 백신 부족에 대한 비난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그 책임을 외부에 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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