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선에 나를 묻어라"..明 영락제, '베이징'을 중국화하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2021. 4. 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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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14> '황제의 무덤' 명13릉
원나라에게서 베이징 빼앗은 明 3대 황제
'영토 지켜라' 의도로 자신의 무덤 만들어
왕국 몰락때까지 사수..황제 13명 안장
1km 남짓 길따라 18쌍 거대 동물석상에
장릉 능은전 너비만 66m 절대권력 과시
만력제 정릉엔 '金冠' 안치된 지하궁전도
중국 베이징의 ‘명13릉’ 입구에 위치한 신도를 관람객들이 살펴보고 있다. 거대한 동물 석상들이 당시 황제의 권력을 웅변하고 있다. 특히 코끼리는 앉을 때 앞다리을 꿇는데 이는 예의를 상징한다는 생각에 즐겨 활용됐다. /최수문기자
[서울경제]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가 된 것은 명나라 때부터다. 원래 명나라의 수도는 양쯔강 하류의 난징이었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3대 황제 영락제 주체가 1421년 베이징으로 옮겼다. 영락제는 신수도로서의 베이징과 함께 궁궐 자금성을 건설한 후 곧바로 자신의 무덤도 만들었다. 베이징의 유명한 문화유산인 ‘명13릉(明十三陵)’이 바로 그것이다. 영락제를 포함해 13명의 명 황제가 묻혀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

베이징 시내 자체는 평원에 속하지만 서쪽에서 북쪽으로 크게 산맥이 휘돌고 있다. 그 산들 위에 만리장성이 서 있고 장성 너머로는 몽골 지역이다. 산악 지역의 맨 아래쪽에 천수산이 있다. 명13릉은 천수산 아래에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다. 베이징 평원과 산악 지대가 만나는 딱 중간이다. 베이징 시내에서는 북쪽으로 약 50㎞ 거리다.

처음 영락제가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원나라의 후예인 몽골과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당시 베이징은 당나라 이후 1,000년 가까이 한족 중국인들의 영역 밖이었다. 베이징을 몽골에서 빼앗은 정복 군주 영락제가 자신의 사후 자리마저 만리장성 바로 아래에 둔 것이다. 이를 테면 최전선에 황제의 무덤을 만든 셈이다.

영락제의 의도는 쉽게 알 수 있다. 어느 후손도 조상의 무덤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왕릉을 마지노선으로 영토를 지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 덕분이었는지 명나라 역대 황제들은 몽골의 잇단 공세에도 베이징을 포기하지 않았다.

베이징의 최종적인 중국화를 완성한 영락제는 무덤 건축에서도 절대 권력을 과시했다. 영락제가 살아서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지은 곳이 자금성이라면 죽어서도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 그의 무덤인 장릉(長陵)이다. 장릉에서 제사를 올리는 중심 건물은 ‘능은전’인데 건물의 너비가 무려 66m나 된다. 자금성의 정전인 태화전보다 2m 이상 넓다. 이후 황제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대한 무덤을 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나라는 몽골이 아닌 국내에서 일어난 이자성 농민반란군에 의해 1644년 국가의 수명을 다한다. 그리고 이때 13릉의 건축물들도 대부분 불에 타버린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대개 만주족의 청나라 이후에 세운 것이다.

13개의 무덤이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는 3대 영락제의 장릉과 13대 만력제의 정릉(定陵) 등 몇 개만 개방돼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이는 나머지들은 황폐해진 채 잡풀로 덮여 있다. 중국 정부는 나머지도 순차적으로 복원해 개방한다고 하니 두고 볼 일이다.

명13릉 탐방은 왕릉지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신도(神道)에서 시작된다. 남쪽 대문 격인 석패방·대궁문을 거쳐 신도가 이어진다. 신도는 원래 영락제 장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만들었지만 이후 다른 12명 황제 무덤의 공용 입구가 됐다.

신도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띄는 것은 1㎞ 가까이 걸쳐 있는 18쌍의 거대한 석상들이다.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길 양쪽에 사자·해치·낙타·코끼리·기린·말이 한 쌍씩 조각돼 있다. 동물들의 경우 앉아 있는 모습과 서 있는 모습이 각각 제작돼 있는 점이 볼 만하다. 동물상 뒤에는 무신상과 문신상도 있다.

당초에는 신도에 연결돼 왕릉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일반 주거지와 도로로 바뀌었다. 자동차로 이동해야 하는데 각 황제의 무덤에서 별도로 입장객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장릉을 기준으로 보자. 능문을 들어서면 능은문이 나오고 이어 핵심인 능은전이 있다. 그리고 명루를 지나 마지막에 산 같은 봉분이 펼쳐진다.

영락제 장릉의 능은전 모습. 원래는 제사를 지내는 곳인데 지금은 유물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최수문기자

능은전은 황제와 관련된 것이기에 자금성 궁궐과 같은 황색 지붕, 홍색 벽으로 칠해져 있다. 현재의 능은전은 정릉에 있던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장이 돼 있다. 바람직한 사용 방법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종묘와 같은 것으로 중국에는 자금성 앞에 ‘태묘’가 있는데 공산당 산하 어떤 단체의 사무실로 사용된다.

황제 무덤의 봉분은 산이다. 산에 묻은 것이 아니라 흙을 산처럼 쌓았다. 나무들도 울창해 진짜 산처럼 보인다. 그리고 봉분 주위로 둥글게 성벽을 쌓아서 외부와 격리하고 있다. 장릉을 전체적으로 보면 뒤쪽 봉분 구역은 원형이고 앞의 건물 구역은 사각형 구조다. 과거 동양 전통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이론에 따른 것이다.

만력제 주익균의 무덤인 정릉도 볼 만하다. 특히 만력제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바로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그다. 중국에서의 혹평과는 달리 한국인 관광객들은 많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정릉에는 핵심인 능은전이 없다. 이자성의 난 때를 비롯해 수차례 파괴됐고 현재도 빈터로 남아 있다.

정릉이 특히 인기인 것은 황제의 관이 안치돼 있는 ‘지하궁전’이 발굴돼 개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1956년에 정릉의 무덤을 팠고 지하 27m 아래에서 묘실을 확인했다. 여기서 3,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면 통로로 연결된 5개의 방이 나오는데 가장 북쪽인 후전에 황제와 2명 황후의 관이 놓여 있다.

/베이징=최수문 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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