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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 "쓰고 버리는 일회용 아냐"..日 간호사 5백명 '강제동원'?

황현택 입력 2021. 05. 02. 07:03 수정 2021. 05. 02.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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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의 올림픽 파견은 곤란합니다.

일본 아이치현(愛知県)의 간호사 단체인 '의노련'(의료·복지·간호 노동조합 연합회)이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글입니다.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가 대회 기간 중 간호사 5백 명 파견을 요청한 데 반발한 이른바 '트위터 시위'입니다.

'트위터 시위'는 지난달 28일 오후 2시에 시작됐습니다. 이틀 만인 30일 낮, 이 해시태그가 붙은 트윗은 24만 건을 돌파했습니다.

아이치현 의노련 측은 " 코로나19로 의료 현장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일손 부족은 한계를 넘었다"면서 " 눈앞의 생명을 버려야 할 정도로 올림픽이 중요한 이벤트"냐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일본 아이치현 간호사 단체가 SNS를 통해 펼치고 있는 ‘트위터 시위’ 이미지.


■간호사 5백 명, 강제동원?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지난달 9일 자로 대회 기간에 활동할 간호사 5백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일본 간호협회에 보냈습니다. 구체적으로 왜 5백 명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과 근거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원봉사' 형태의 요청이었습니다.

간호사들은 어이없다는 반응입니다. SNS에는 " 간호사를 파견해야 할 곳은 올림픽이 아닌 의료 현장이다", " 간호사는 한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이 아니다", " 의료 현장에 있어 최대의 지원은 올림픽 중단" 등의 글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내 코로나19 하루 확진자는 연일 5~6천 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기존 감염자 대응 업무 외에 수요가 급증하는 유전자증폭(PCR) 검사와 백신 접종 등으로 간호사 부족이 심각한 상황이죠.

이 때문에 올림픽에 간호사를 많이 투입할 경우 지역의료 체제 운영상의 차질이 심화할 거란 우려가 큰 게 사실입니다. 특히 간호사들이 지칠 대로 지친 상황에서 '올림픽 차출'이 현실화할 경우 '대량 퇴직 사태'를 불러올 것이란 우려마저 나옵니다.

도쿄올림픽 의료체제 구축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마루카와 다마요 올림픽 담당상(왼쪽)과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epa·ap=연합뉴스]


■올림픽 의료 놓고 '으르렁'

일본 의료 시스템이 붕괴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최근엔 도쿄올림픽 의료체제 구축 문제를 놓고 정부 내 분열상까지 노출됐습니다.

주인공은 정부를 대표하는 마루카와 다마요(丸川珠代) 올림픽담당상(장관)과, 개최 도시를 대표하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東京都) 지사. 포문을 연 건 마루카와 올림픽상이었습니다.

그는 지난달 27일 기자회견에서 올림픽 기간 중 도쿄도의 의료 체제에 대해 " 개최 당사자로서 어떻게 할 작정인지 알려달라. (도쿄도는) 어떻게 책임을 완수할 거냐. 정부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매우 당황스럽다"며 쓴소리를 했습니다. 도쿄도에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는데 2주 동안 아무런 답도 듣지 못했다는 '폭로'까지 곁들였습니다.

고이케 지사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바로 기자들에게 " 이미 실무선에선 의견을 나누고 있다"는 취지로 역공을 폈습니다. 마루카와에게 '담당 부처 안 상황도 제대로 파악 못 하고 있다'는 식으로 핀잔을 준 겁니다.

일본 정계에서 두 사람은 '앙숙'으로 꼽힙니다. 5년 전, 도쿄도 지사 선거에서 고이케가 집권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해 독자 출마하자 마루카와는 "팀플레이를 하지 않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올림픽 비관론'이 커지는 가운데 두 사람의 '장외 싸움'까지 불거진 상황.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지난달 30일 사설에서 "두 사람은 이전에도 올림픽 비용 분담 문제를 놓고 불협화음을 낸 적이 있었다"면서 "이런 상황에선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사회 구성원에게 올림픽 개최를 응원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無理)"라고 꼬집었습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준비 중인 일본 간호사 [일본 교도통신]


■사라진 간호사 '50만여 명'

다시 간호사 이야기입니다. 일본이 '간호사 부족'에 시달리는 데는 코로나19가 장기화하는 것 외에 구조적 이유도 있습니다.

일본 정부 통계를 보면 2019년 말 현재 간호 자격을 보유한 사람은 121만여 명(한국은 39만여 명)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현업에 종사하지 않는 '잠재 간호사'는 전국적으로 70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이른바 '장롱 면허'입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 여기에 결혼과 출산, 육아, 간병 등을 이유로 일터를 떠난 사람들입니다.

일본 후생노동성은 애초 간호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재 간호사'의 복직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꼬였습니다. '잠재 간호사' 소재를 몰라 연락할 방법 자체가 없었던 겁니다.

일본에서 간호사는 국가자격증이지만, 자격증 소지자에 대한 정보 관리는 다른 국가자격증과는 다릅니다.

의사와 치과의사, 약사 등 3개 자격은 재직 여부와 관계없이 2년에 한 번씩 국가에 주소와 연락처 등을 신고해야 합니다. 위반했을 때는 50만 엔(한화 511만 원) 이하의 벌금이 있습니다.

일본 NHK 방송 화면 캡처


■'학도 동원' 논란까지

반면에 간호사는 지방자치단체에 2년에 한 번씩 주소와 근무처 등을 신고하게 되어 있으나,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신고를 하지 않아도 벌칙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잠재 간호사' 가운데 소재지가 등록된 사람은 13만 명(18.5%)밖에 안 됩니다. 그마저도 연락처가 바뀐 사람이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7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잠재 간호사' 가운데 무려 80% 이상이 '사라진' 존재가 된 셈입니다.

이에 간호협회 측은 " 정부는 그동안 간호사가 일을 그만두면, 신규 졸업자로 채우면 그만이었다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면서 " '잠재 간호사' 소재는 더 이상 파악할 필요가 없다는 낡은 발상에서 비롯한 제도가 지금의 '간호사 부족 사태'를 불렀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본 후생성은 대신 간호 관련 학과를 둔 전국 287개 대학과 대학원생을 의료 현장에 조기 투입하는 방안을 짜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학도 동원 아니냐"는 논란에 부닥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news1@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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