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노동, 첫 폐 CT [빼앗긴 일터 건강권 (상)]

고희진 기자 2021. 5. 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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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 사업장' 주얼리 노동자 건강검진 해보니
분진·화학물질 노출..대다수 작업환경 안전에 둔감
근로계약서도 없이 취업해 4대보험 사각지대 '방치'

[경향신문]

지난 4월 17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주얼리 노동자 A씨와 동료가 윤간우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로부터 만성폐쇄성폐질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모니터에 보이는 A씨의 흉부 CT 사진에서 짙은 검은색으로 표시된 곳들이 폐기종이 일어난 부분이다.

서울 종로4가. 대로변에 늘어선 금은방들을 뒤로하고 뒷골목에 들어서면 5~6층짜리 상가 건물이 즐비하다. 퇴근시간을 넘긴 오후 8시. 어둑해져가는 길가에 창문으로 형광등 빛이 새어나온다.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이지만 때가 타서 검은색으로 변한 ‘자바라’(환풍기 주름관)가 창문 옆으로 튀어나온 게 보인다면 그곳은 노동자들이 야근하는 ‘보석 세공 업체’다.

땅땅. 밤인데도 반지를 쇠봉에 꽂아 동그랗게 모양을 잡기 위해 망치로 치는 소리가 들린다. 컴프레서로 반지를 세척하는 ‘칫칫’ 소리도 이어진다. 연장수당도 없는 야근보다 무서운 것은 금속을 연마하고 광낼 때 쓰는 ‘수프라클린 엑스트라’ ‘에이스 클린’ ‘시안화나트륨’ 등 이름도 생소한 화학약품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노동자는 특수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곳 노동자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특수검진은커녕 직장건강검진도 받지 못한다. 다수가 10명 안팎 작업장이어서 4대보험에 가입해야 하지만 사업주가 가입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이 보장하는 연차도 없다. 그래서 2년마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일반건강검진을 받기도 어렵다.

경향신문은 지난 3월27일부터 4월24일까지 녹색병원에서 진행된 주얼리 노동자 15명의 건강검진 결과와 이들의 근무 이력을 분석했다. 분진에 노출되기 쉬운 주얼리 노동자 특성에 맞춰 폐기능 위주로 검진을 실시했다.

진단 결과 만성폐쇄성폐질환 진단자가 1명이었다. 만성폐쇄성폐질환 진단을 받은 노동자 A씨(58)의 폐는 일반인 평균의 70% 정도만 기능하고 있었다. 산업재해 신청을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A씨는 약 39년간 주얼리업계에서 일했지만 “폐 CT는 처음 찍어봤다”고 했다. A씨 외에 폐기종 3명, 기관지염 1명이었다. 이들 역시 상황이 악화되면 A씨처럼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약 한 달간 15명을 검진한 결과 4명이 폐질환 진단을 받았다. 검진 대상자를 늘리면 폐질환 진단을 받는 노동자 역시 늘어날 공산이 크다. 주얼리업계뿐만 아니다. 봉제, 제화, 인쇄 등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며 4대보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 다수가 비슷한 상황일 것으로 추정된다.

‘영세 작업장’이라는 이유로 정부의 관리·감독에서 벗어난 사이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건강권마저 박탈당해왔다. 임상혁 녹색병원 원장은 “일터에서 일하다 다쳐 병원에 가는 것을 넘어서, 주 52시간을 지킬 권리, 건강검진을 받을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권리, 유해물질의 정보를 알 권리 모두 노동자의 건강권”이라고 했다.

15명 중 4명이 폐질환…‘직업병’
산재 신청 권하자 “잘릴까봐”

지난달 17일 오전 9시, 중랑구 녹색병원 앞에 주얼리 노동자들이 모였다. 각각 은평구, 인천 부평, 경기 용인에서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온 B씨(48), C씨(46), D씨(49)와 이들의 건강검진을 안내하기 위해 온 김정봉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분회장이었다.

올해로 주얼리 업계에서 근무한 지 26년이 된 C씨가 직전에 건강검진을 받은 것은 6년 전이다. 오랜만의 병원 나들이에 오전 6시15분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났다고 했다. 그는 “일이 바쁘고 국가 건강검진을 하려 해도 연차가 없으니까 그냥 검진을 안 했다”고 했다.

2018년 생긴 주얼리노조가 이번 건강검진을 이끌었다. 세 사람은 검진을 기다리며 “병원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 폐CT는 처음 찍어봐요” “난 폐에서 뭐 나올 것 같아. 어릴 때부터 폐가 안 좋다고 그랬어” “노조 때문에 종로 바닥 사장들이 다 야근비 줘야 한다고 얘기래”라는 대화를 나눴다.

2시간여 만에 건강검진이 끝났다. 3명 모두 폐 기능은 정상으로 나왔다. 건강검진 전 막연히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가셨다. 누군가는 매해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이들은 모두 몇 년 만에 느껴보는 ‘건강할 권리’였다.

A씨의 손. 지난해 주얼리 광택 작업 중 장갑이 기계로 빨려들어가 가운데 손가락을 다쳤으나 산재 신청은 하지 못했다. A씨는 39년간 종로 주얼리 업계에서 일했지만, 4대보험에 가입된 사업장에서 일한 경험은 2년 남짓뿐이다.

■ 폐질환은 ‘직업병’

15명 중 10명이 폐 기능에서 정상 진단을 받았다. 검진받은 노동자들 연령대는 30대 3명, 40대 8명, 50대 4명이었다. 경력은 5년에서 39년 사이로 평균 약 22년이었다. 작업 유형별로는 광택 작업을 하는 이들이 10명, 캐스팅 3명, 조각 1명, 주물 1명이었다.

원자재로 만들고자 하는 보석의 모양, 틀을 잡는 작업을 주물이라고 한다. 줄질 등을 통해 보석의 모양을 만드는 과정이 캐스팅, 보석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광을 내는 작업이 광택이다. 모든 작업에서 가공하는 원자재의 가루가 다량 발생한다. 특히 광택 작업 중에는 다수의 금가루 등이 사업장에 뿌려진다. 노조와 병원이 주얼리 노동자의 폐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짐작한 이유다.

폐질환이 이들의 직업병이 된 데는 작업장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15년간 광택 작업을 하다 폐기종 진단을 받은 E씨(40)는 “집진기가 매일 돌아간다고 하지만 먼지가 쌓인 채로 운영된다. 먼지가 쌓이면 집진기의 흡입력이 약해져 먼지가 오히려 밖으로 새어나오는데도 그냥 둔다”며 “한 달에 한 번만 청소를 하는데, 사실상 깎여나간 금가루 모으는 용도로 사용되는 현실”이라고 했다.

환풍시설이 설치돼 있지만 부족한 곳도 많다. 지난달 22일 찾은 종로 주얼리 거리. 건물에 설치된 자바라 다수가 오랜 사용으로 먼지때가 타 짙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나마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의 자바라는 설치한 지 오래되지 않아 빛나는 은색을 띠었다. 모양도 튼튼하고 사업장 창문부터 옥상까지 연결도 잘돼 있었다. 하지만 800여개로 추정되는 종로 주얼리 사업장 중 노조가 설립돼 사측과 단체협약까지 체결한 곳은 단 4곳에 불과하다.

기본적인 환기시설을 갖추기도 어려운데 유해화학물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다.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사업장은 해당 물질의 목록과 사용처 등을 적은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사업장에 배치해 노동자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종로 일대에서 MSDS가 비치된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들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9년 서울노동권익센터는 ‘서울지역 주얼리 제조업 종사자의 안전과 건강실태 연구’를 냈다. 당시 센터가 이 일대 6개 사업장에서 화학물질 현황을 조사한 결과 사용하는 화학물질 제품은 12종, 노출 화학물질은 19종이었다. 아황산나트륨, 무수황산나트륨, 과산화수소, 시안화나트륨, 수산화나트륨, 수프라클린 엑스트라, 에이스 클린, 산화크롬, 실리콘카바이드 등이다.

당시 센터가 노동자 303명에게 ‘작업장 내 유해물질 인식 여부’를 묻자 184명(60.7%)이 모른다고 했다. ‘건강을 위한 대책’(복수응답)을 묻는 질문에는 유해물질 배출장치 설치 등 작업장 환경개선 지원(120명)과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가입 지원(100명)이라고 답한 이들이 가장 많았다.

■ “산재? 잘릴까 두려워”

만성폐쇄성폐질환 진단을 받은 A씨는 10대 후반부터 주얼리 업계에서 일했다. 최근에는 오전 8시30분 출근해 오후 6시30분에 일을 마치지만, 과거에는 새벽 근무가 흔했다고 했다. 광택 작업을 하면 “하루만 지나도 작업복이 먼지투성이가 된다”고 했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이라는 말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그는 “‘폐쇄’라니까 뭐 어디가 막혔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언제 검사를 받아봤어야 알지”라고 했다.

약 39년간 이 업계에서 일했는데, 4대보험을 해주는 사업장에서 일한 경험은 2년 정도가 전부다. 지난해에는 광택 작업을 하다 기계에 장갑이 빨려들어가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다쳤다. 지금도 그 손가락이 잘 굽혀지지 않는다. 산재 신청은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망설여진다. 질환 내용과 산재 신청 방법 등을 안내받기 위해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와 만난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은 “제가 예전에 담배를 피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였다. 일자리를 잃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윤 전문의가 A씨의 흉부 CT 사진을 띄워놓고 말했다.

“원래 선생님 키랑 몸무게면 이 폐의 용량 사이즈가 4ℓ 정도 돼야 해요. 근데 선생님은 2.8ℓ밖에 안 돼요. 폐활량도 평균의 70% 정도로 떨어져 있어요. CT 보면, 이렇게 꺼멓죠. 폐가 다 죽어 있는 거예요. 폐기종이 쭉 있어요. 담배도 그렇지만, 작업하면서 먼지 많이 마시면 이렇게 돼요. 세공하다보면 세척제, 연마제 이런 데 산류가 많이 쓰이거든요. 지금이야 환기가 되지만, 전에는 그냥 막 썼잖아요. 제 생각에는 산재 신청을….”

A씨가 말했다.

“제가 4대보험 한 게 2년뿐이에요. (39년 일했지만) 기록이 없잖아요. 친구가 일 다 그만둔 다음에 하라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어서 몇년 더 일할 수 있는걸… 거기서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일자리도 구하기 힘든데.”

부양가족이 있다는 A씨는 상담을 마치고 나오며 “회사에서는 핑계김에 자를 수 있는 거잖아. 나는 그냥 하루라도 더 일하고 싶은 거야”라고 했다. 일방적인 해고 등을 포함해 그가 이 업계에서 사업장을 옮긴 경험은 스무 번이 넘는다.

주얼리, 봉제 등 도심 소규모 제조 노동자들 상당수가 노동 현장에서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유해한 작업환경으로 인한 질병의 발현을 모르는 이들이 다수일뿐더러 설혹 안다고 해도 적절한 요구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건강검진은 노조를 통해 신청한 이들에 한해 무료로 진행됐다. 김 분회장은 “건강검진이 노조 활동처럼 보일 것을 우려한 이들이 신청을 꺼렸다. ‘검사받기 무섭다. 아프다면 어떡하냐’고 한 이들도 있었다”며 “산재 신청 역시 두려워한다. 노동자 한 명이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는 어렵다. 궁극적으로 소규모 사업장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노동부의 감독과 지도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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