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도서관 여는 원자력 대부 "아이들에게 '왜?'를 선물할것"

세종=지명훈 기자 2021. 5.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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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다 만나는 시골 아이들이 순박해 보였다.

장 전 원장은 "연구 자문과 독서, 글쓰기를 하러 회사를 오가다 아이들을 보고 뭔가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꿈을 캐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도서관 출입구에는 '2021 왜?' '2121 WHY?'라고 새긴 철판 현판이 있다.

도서관장으로 인생 3막을 여는 장 전 원장은 "아이들이 다양한 책과 강좌를 접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체득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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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세종시 전의면 마을 도서관 5일 개관.. 사재 5000만원 들여 책 9000권 마련
年 24시간 개방.. 타고온 택시비 지원
"꿈 캐는 도서관.. 한명의 변화에 만족"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이 5일 세종시 전의면에 문을 여는 ‘전의마을 도서관’에 붙일 ‘2121 WHY?’ 현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간을 내서 자녀와 같이 독서하고 공부하는 게 아이들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조언했다. 세종=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오가다 만나는 시골 아이들은 순박해 보였다. 몽당연필조차 귀할 정도로 열악했던 고향 섬마을(여수 돌산)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원로 과학자는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울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개월의 준비 끝에 절이나 들어설 법한 산중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찾아오기조차 어려운데 효과가 있겠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또렷했다, “그 질문 가장 많이 받아요. 단 한명의 아이한테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그걸로 만족이죠….”

원자력계의 대부로 불리는 장인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원장(81)이 세종시 전의면 어천길에 ‘전의 마을 도서관’을 어린이날인 5일 개관한다. 고려전통기술㈜& 고려도검 공장 건물 2층 150㎡ 빈 공간에 초중고교생용 3000권을 비롯해 모두 9000권 가량의 장서를 갖췄다. 지난해 12월 출간한 ‘여든의 서재’에서 약속한 대로 책 판매 수익금 5000만원을 모두 털어 넣었다.

공간은 이 회사 대표이자 수양딸인 라연희 씨가 제공했다. 장 전 원장은 “1년 전부터 이 회사에 나와 연구 자문하고 책 읽고 글 써왔다”며 “출퇴근길에 만나는 아이들을 보고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장 전 원장은 197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해외 한국인 과학자 유치 프로젝트에 따라 미국에서 귀국했다. 대전 핵연료개발공단에서 일을 시작해 2005년 원자력연구원장(당시 소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핵연료 국산화, 원자로 개발 등을 이끌었다. 처음 귀국해 대덕연구단지(지금의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왔을 때 연구 환경은 척박하기만 했다. 비닐 덮은 사과박스가 실험대였다.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우뚝 일어서야 한다는 조국애와 연구 의지로 불타던 동료들과의 우정으로 버티면서 원자력 연구에 전념했다.

이렇게 원자력 입국을 이룬 터여서 탈원전 얘기가 나오자 금방 언성이 높아졌다. “천신만고 끝에 이룬 원자력 성공 신화를 정부가 무너뜨리고 있어요. 원자력 없이 탄소 제로 가능합니까? 탈원전으로 핵무장과 원전수출 잠재력이 사라지면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북한과 중국 아닌가요?” 그는 전에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탈원전과 북핵 문제에 대한 안타까움을 격정적으로 토로했었다.

‘꿈을 캐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도서관은 집기에서 운영까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졌다. 출입구에는 ‘2021 왜?’, ‘2121 WHY?’라고 새긴 철판 현판이 있다. 교육은 백년(2021~2121) 대계이며 문명사는 ‘왜?’라는 물음에서 시작됐다는 의미다. 삼각형, 사각형, 원(태극), 별, 달 등 형태가 하나도 겹치지 않는 책상과 의자를 비치했다. 기하학과 천문학을 의미하는 모양들이다.

도서관은 언제나 내 집처럼 드나들도록 연중 내내 24시간 개방한다. 뒹굴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소파도 마련했다. 정직과 신뢰는 서로 만들어가는 것이란 의미에서 책을 빌려갈 때 대여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했다.

주 고객인 전의초등학교(전교생 163명)와 전의중학교(116명) 학생들에 대한 특별 교통대책도 마련했다. 버스가 닿지 않는 만큼 부모가 차로 데려다 주기 어려운 경우 아이들이 택시를 불러 타고 오면 장 전 원장이 대신 요금을 내주기로 택시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시골에서 접하기 어려운 명품 강좌도 마련한다. 자신이 초대 회장을 지낸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의 따듯한과학마을벽돌한장(회장 정용환)에 과학 강연을 의뢰하기로 했다. 벽돌한장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우수한 과학자들을 대거 강사 풀을 갖춘 민간 과학 대중화 단체다.

장 전 원장은 직접 강의와 토론을 진행할 생각이다. 과학을 전공한 데다 방대한 인문학 독서를 해와 수학, 과학, 우주, 미래, 역사, 시, 독서, 글쓰기 등 어떤 강의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은 수학을 하는 게 아니다”는 고교 담임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원자력학자(당초 화학자)가 아닌 수학자가 됐을 것이라는 그는 지금도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다.

장 전 원장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독한 독서광인지 알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가지의 기도만 해왔는데 그건 ‘책과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시력을 지켜 달라’는 것이었다”며 “친구들과 달리 아직 눈 때문에 책을 못 읽는 일은 없어 감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장 전 원장은 퇴임 후에만 시집 1600권을 제외하고도 4000여 권의 책을 읽었고 ‘상상력은 우주를 품고도 남는다’ 등 4권의 책을 펴냈다. 퇴임 즈음에 ‘이 하루는 왜 이렇게 소중한가(While I breathe, I hope)’라는 기원전 서양의 경구를 마음에 새기게 됐다는 그는 “지금도 스스로 정한 ‘하루 8시간 독서’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 한다”고 말했다.

장 전 원장은 독서 전도사이기도 하다. 가방을 든 사람들에겐 “책이 그 안에 들어 있어야 비로소 명품가방”이라고 일깨운다. 지금도 친구와의 약속 장소를 서점으로 정해 책을 선물한다. 가정의 달 아이들에게 무얼 선물해야 좋겠냐고 물었더니 “시간 내어 자녀들과 같이 독서하고 공부하는 게 최고의 선물”이라고 조언했다.

원로 과학자의 도서관 개관 소식에 지역 주민들은 벌써부터 술렁인다. 학교들은 과학자들의 강좌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관심 있는 학부모들은 미리 도서관을 찾아오기도 한다.

장 전 원장은 “시골 마을 도서관장으로 인생 3막을 연다는 기쁨에 주당 6일씩 대전에서 매일 100㎞를 운전해 오가지만 피곤한 줄을 모른다”며 “전의 마을 아이들이 이 도서관에서 다양한 책과 강좌를 접하면서 ‘왜?’라는 질문을 체득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말했다.

세종=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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