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 '무릉도원도' 100년만에 세상 나온다

전지현 2021. 5. 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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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1488점 세부 공개
이중섭 스승 백남순·1세대 여성화가 나혜석
29세 요절한 김종태 1929년작 '사내아이'
운보 김기창 4m 대작 '군마도' 등 희귀작 포함
이상범, 무릉도원도, 1922, 158.6x390cm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었던 청전 이상범(1897~1972)의 1922년 청록산수화 '무릉도원도'(158.6x390cm)가 100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상범이 불과 25세에 후원자 이상필 요청으로 제작한 그림으로 존재만 알려졌을 뿐, 실물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의뢰작인 만큼 최고급 재료로 작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한 이 그림이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삼성 회장 기증품'에 있었다.

7일 이 작품을 공개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스승인 심전 안중식(1861~1919) '도원문진도' 전통을 잇는다고 할 만한 과감하고 아름다운 색채와 구성이 눈길을 끈다"며 "존재만이 알려진 작품이었는데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돼 더욱 큰 의미를 지닌다"고 밝혔다.

이날 국립현대미술관은 고 이건희 삼성 회장 유족이 기증한 미술품 1488점(1226건)을 공개했다. 이번 기증작은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 238명 작품 1369점, 외국 근대작가 8명 작품 119점으로 구성됐다. 회화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순으로 다양한 장르가 고르게 포함됐다.

제작연대별로는 195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이 320여점으로 전체 기증품의 약 22%를 차지한다. 그러나 작가의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할 때 1930년 이전에 출생한 이른바 '근대작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가 작품 수는 860점에 이르러 전체 기증품의 약 58%를 차지한다. 작가별 작품 수를 보면 유영국 187점(회화 20점, 판화 167점)으로 가장 많고, 이중섭 작품이 104점(회화19점, 엽서화 43점, 은지화 27점 포함), 유강열 68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변관식 25점, 권진규 24점 순이다.

김기창, 군마도, 1955, 205x408.2cm
기증작 중에 운보 김기창(1913~2001)이 1955년 달리는 말들을 강렬하게 그린 대작 '군마도'(205x408.2cm)가 눈길을 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말들의 동세(動勢) 표현이 탁월하다. 김기창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폐허를 딛고 재개된 195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추천위원 자격으로 이 작품을 출품했다. 전후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했던 작가의 심정이 표출되는 듯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역동감을 표현하는 한국화의 교과서와 같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며 "그의 여러 '군마도' 작품 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손꼽힐 만큼 압도적이다"고 설명했다.
이중섭, 바닷가의 추억_피난민과 첫눈, 1950년대, 32.3x49.5cm
이중섭(1916~1956)이 1950년대 한국전쟁 중 피난지에서 맞이한 첫 눈의 인상을 그린 '바닷가의 추억/피난민과 첫눈'(32.3x49.5cm)도 있다. 눈은 펑펑 내리고, 거리로 나앉은 피난민들은 그저 새와 물고기 등 동물들과 어울려 나뒹굴고 있다. 슬프고 아련한 인상을 주며 왠지 동물들이 건네는 인사가 일종의 위안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중섭은 가족을 데리고 원산폭격을 피해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남하했다고 전해진다. 거제를 거쳐 제주도로 왔는데 첫 눈은 내리고, 이들은 거처할 곳을 찾지 못해 외양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
백남순, 낙원, 1937, 166x367cm
이중섭 스승인 백남순(1904~1994)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인 1937년작 '낙원'(166x367cm)도 기증됐다.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서양화가로 1920년대 파리 유학을 가서 미국 유학을 했던 임용련을 만나 결혼한 후 1930년 귀국했다. 이들의 부부양화전이 당시 엄청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임용련과 백남순은 함께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보에서 영어·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그곳에서 이중섭, 문학수 등을 가르쳤다. 현존하는 사진 자료를 보면 백남순 '낙원'이 오산고보 미술반에 펼쳐져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의 무릉도원 전통과 서양의 아르카디아(낙원) 전통이 묘하게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으로, 1930년대 백남순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전해지는 만큼, 역사적 의미가 각별하다"고 밝혔다.

나혜석, 화녕전작약, 1930년대, 33x23.5cm
현존하는 작품이 거의 없는 나혜석(1896~1948) 1930년대 작품 '화녕전작약(華寧殿芍藥)'(33x23.5cm)도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1세대 유화가이자 첫 여성 서양화가이며 문학인이기도 하다. 도쿄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으며, 파란만장한 생애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돼 현존하는 작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화녕전작약'은 그가 '이혼고백서' 발표 후 엄청난 사회적 스캔들을 일으킨 이후에 제작된 그림이다. 수원 고향집 근처 화녕전 앞에 핀 작약을 빠른 속도감으로 날아갈 듯한 필체와 강렬한 색채로 표현했다.

김종태, 사내아이, 1929, 53x45.4cm
29세에 요절한 김종태(1906~1935)의 1929년작 '사내아이'(53x45.4cm)도 희귀작이다. 거의 독학으로 서양화를 공부해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추천작가가 된 인물이다. 한때 높은 명성을 누리며 많은 야사를 남겼지만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총 4점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중 2점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노란 저고리'(1929)와 쌍을 이루는 '사내아이'가 이번에 기증됐다. 일본인 화가들에게도 늘 큰소리를 치며 당당했던 김종태는 본인의 사인을 늘 한자로 세로쓰기 했으며, 유화를 그리면서도 마치 동양화의 '일필휘지'를 구사하듯 특유의 붓놀림을 선보였다. 빠른 속도로 몇 번의 붓질만으로 대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탁월한 묘사력으로 유명하다.
장욱진, 공기놀이, 1937, 65.5x80.5cm
장욱진(1917~1990)이 20세에 그린 1937년작 '공기놀이'(65.5x80.5cm)도 포함돼 있다. 1937년 양정고보 재학 중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상을 받게 되면서 집안사람들로부터 화가가 되어도 좋다는 암묵적 허가를 받게 된다. 화가 박상옥이 소장하다가 이건희 컬렉션을 거쳐 이번에 기증됐다.

이번 기증작들은 작품검수, 상태조사, 등록, 촬영, 저작권협의, 조사연구 등을 통해 순차적으로 미술관 누리집에 공개될 예정이다. 공식 명칭은 '이건희 컬렉션'으로, 향후 작품 기본정보에 포함돼 누리집 공개는 물론 전시와 출판 등에 표기되어 평생 수집한 미술품을 국민의 품으로 보내준 고인과 유족의 정신을 기릴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오는 8월 서울관을 시작으로 내년 과천관, 청주관 등에서 특별 전시, 상설 전시, 보이는 수장고 등을 통해 작품을 공개할 예정이다. 먼저 8월 서울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1부: 근대명품'(가제)을 통해 한국 근현대 작품 40여점을, 12월 '이건희 컬렉션 2부: 해외거장'(가제)을 통해 모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의 작품을, 내년 3월 '이건희 컬렉션 3부: 이중섭 특별전'을 통해 이중섭의 회화, 드로잉, 엽서화 104점을 선보인다.

덕수궁관에서는 오는 7월 '한국미, 어제와 오늘' 전에 일부 작품을 선보이고, 11월 '박수근' 회고전에 이건희 컬렉션을 대거 선보일 예정이다. 내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열리는 한국 근대미술전에도 이건희 컬렉션 중 일부를 선보여 수준 높은 한국 근대미술을 해외에 소개할 계획이다.

과천관에서는 이건희 컬렉션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및 아카이브의 새로운 만남을 주제로 한 '새로운 만남'을 내년 4월과 9월에 순차 개막한다. 청주관에서는 수장과 전시를 융합한 '보이는 수장고'를 통해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들을 심층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또한 내년에 지역 협력망미술관과 연계한 특별 순회전을 개최해 보다 많은 국민들이 소중한 미술자산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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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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