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살에 화가가 된 佛 세관원.. 독학으로 초현실주의 이끌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김예진 입력 2021. 5. 8.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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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앙리 루소와 새로운 삶의 형태들
형편 어려워 고교 졸업하자마자 취업
통행료 징수하는 업무로 20여년 보내
화가 꿈꾸다 마흔 넘어서 작업에 집중
평면적이고 공간감 없어 혹평 잇따라
가본 적 없는 밀림, 상상만으로 화폭에
자유롭고 거침없어 환상적인 느낌 줘
'사자의 식자', 反이성주의 상징성가져
피카소·막스 에른스트 등에 영향 미쳐
앙리 루소, ‘사자의 식사(The Repast of the Lion)’, 1907, 캔버스에 유채, 113.7x160㎝.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새로운 삶의 형태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저녁 시간에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여유였다. 덕분에 평소에 보지 못한 뉴스와 연재를 읽었다. 그중 기억에 남은 것은 파이어족인 누군가의 연재였다. 파이어족은 은퇴 자금을 마련해 조기 은퇴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최근 이슈이지만 미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부터 확산하기 시작했다. 은퇴에 성공해 그 이후 삶을 기록하는 연재에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댓글은 양극단으로 나뉘었는데 모두 각자의 이유는 있었다.

자기 삶은 결국 자기가 꾸려나가는 것이기에, 파이어족의 삶의 형태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인간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지금 다양한 삶의 모습을 떠올릴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로 긴 편이다. 일찍 은퇴 후 여유를 즐기며 살 수도 있고 살면서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삶의 형태들이 앞으로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앙리 루소(Henri Julien Felix Rousseau, 1844~1910)의 삶과 작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파리의 세관원으로 일했던 루소는 은퇴한 뒤 나이 50이 넘어 미술가가 됐다. 그런데도 그는 약 15년간이나 화가라는 직업으로 살고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남긴 작품 수는 200점 미만이지만 대체 불가한 작품세계로 미술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파리의 세관원, 앙리 루소

앙리 루소는 프랑스 북서부 도시 라발(Laval)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으나 이외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 졸업 이후에 바로 법 관련 일을 시작했다. 이후 군대에서 근무하던 도중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제대한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거기서 파리 세관 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세관원으로 살게 되었다. ‘두아니에’(세관원, Le Douanier)라는 항상 따라다니는 닉네임은 이 경력에서 왔다.

루소는 말단 공무원직을 수행했다. 가만히 앉아 통행료를 징수하며 매일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20여년의 시간을 보내며 꿈을 꿨다. 화가가 되는 꿈이었다. 고된 일과 속에서도 그림 그리는 일을 지속했다. 마흔이 넘어서는 그림 그리는 일을 더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작업실을 구했고 공식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와 다른 삶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9세에 은퇴하자마자 전업 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그의 하루는 통행 징수 대신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앙리 루소, ‘비세트르 근교 비에브르 기슭(The Banks of the Bievre near Bicetre)’, 1908~1909, 캔버스에 유채, 54.6x45.7㎝.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이렇게 시작한 대표적인 초기작은 ‘전쟁 혹은 불화의 기마 여행(La Guerre ou la chevauchee de la discord)’(1894)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소장한 이 작품의 한가운데는 말을 탄 여인이 있다. 거대하고 재빠른 흑마 위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앉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있고 왼손에는 불타는 나뭇가지가 주어져 있다. 발아래에는 사람들이 널려 있는데 그들을 향해 까마귀들이 날아온다. 아마 이미 죽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잿빛 하늘이 어두운 분위기를 강조한다.

이 작품을 보면 떠오르는 앞선 시기의 작품들이 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이나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1819) 등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같이 가운데 인물을 배치해 고전적이고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취한다. 바닥에서 보이는 시신들의 형태와 분위기는 ‘메두사호의 뗏목’과 닮았다. 루소는 이 작업에서 거장들이 남긴 아카데미적인 대형 알레고리화를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적인 방식을 따라서 완벽하게 대상을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독학으로 펼친 이러한 시도의 결과물은 예상과 달랐다. 소묘를 한 적이 없으니 작품 속 모든 형태가 어색하게 그려졌다. 원근법을 배운 적이 없기에 화면은 공간감이 없는 평면의 모습을 보여줬다. 명암에 관한 이해가 부족해 원색으로 칠한 화면은 이 평면감을 더 강조했다. 평론가들은 루소의 이 시기 작품을 두고 혹평을 해댔다. 아마추어 화가라고 여기며 조롱과 멸시를 던졌다. ‘소박한’, ‘어린아이’와 같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이제 현실이 되기 시작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매년 독립 미술가전인 앙데팡당에 작품을 출품했다.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화풍은 루소 작품만의 매력이 되었다. 차츰 전에 없던 작업 스타일에 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거침없는 붓질과 고정관념을 깨는 화면구성은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했다. 당시 팽배한 이성주의에 대항하여 승리하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루소는 들라크루아 등의 작품들을 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들라크루아, ‘레베카의 유괴’, 1846, 캔버스에 유채, 100.3x81.9㎝.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제공
#앙리 루소의 상상 밀림

앙리 루소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일련의 밀림 그림들이다. 그는 1891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 주제를 처음 선보였다. 이후 1900년대 초에 약 10여년간 집중적으로 밀림 풍경을 그렸다. 루소는 독학했기 때문에 작품에 서명과 제작연도를 남기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 같다. 완성 후에도 그림을 여러 차례 수정하여 이런 정보가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밀림 작품은 이 시기에 30여점 정도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자의 식사(The Repast of the Lion)’(1907)는 이러한 작품 중 한 점이다. 열대식물들이 빽빽하게 가득 찬 열대의 산림이 눈앞에 있다. 종이로 오려 붙인 듯 각자의 형태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풀잎들이 만든 세계다. 새하얗고, 샛노랗고, 새파란 색의 꽃들이 그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낸다. 꽃들의 기묘한 형태는 도시에서 볼 수 없기에 이국적 느낌을 전한다. 원색의 꽃들은 이곳이 열대강우림의 어딘가일 것 같다는 힌트를 준다. 이러한 밀림의 가운데서 사자는 고요히 자기만의 식사를 즐긴다. 피가 흐르는 그 장면 뒤로 달이 휘영청 떠오른다.

이 작품은 루소가 1907년 살롱 도톤에서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살롱 도톤은 1903년부터 매년 가을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전람회였다. 루소의 이러한 밀림 풍경은 모두 실제 경험이 아닌 상상에 기초해 그린 것이다. 루소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떠난 적이 없다. 대신 대상 참고를 위해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 등을 자주 찾았다. 이 그림은 상상에서 비롯했기에 더 환상적인 느낌을 우리에게 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정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이기에 더 깊은 열망과 향수를 갖게 한다.

밀림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그는 결국 화가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죽은 이후에도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 막스 에른스트 등이 그에게서 영감을 얻은 바 있다고 밝혔다.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작가들은 그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렀다. 특히 밀림 그림은 이성을 반대하는 그들에게 성공적인 예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일반적 경우처럼 은퇴 후 파리 근교에서 노년을 보냈다면 없었을 일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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