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도, 증인도, 재판부도 판사..정의가 쳇바퀴 돈다

고한솔 2021. 5. 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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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사법부][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29) 형사재판 교과서의 아이러니

삼성 이재용도 6개월째 결론냈는데
양승태·박병대·임종헌은 2년째 1심
'보통 법정'선 못 볼 광경들 잇따라
"다른 재판도 같은가" 질문 남겨
사법농단에 연루된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1심 공판은 재판의 독립, 판사의 독립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난달 19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부터),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이 각각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광풍이 사법부까지 불어왔습니다. (중략) 이제 그 광풍이 할퀴고 간 자국을 보며 ‘왜 이렇게 됐나’ 살펴보는 상황에서도 과거 형성된 예단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걱정됩니다.”

지난 4월7일 사법농단 재판에서 피고인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입을 뗐다. 그는 검찰 수사가 언론으로 생중계되며 피고인은 곧 유죄라는 예단이 생겼는데, “모쪼록 새 재판부에서는 그러한 상황을 잘 혜량하고 특히 이 사건의 본질과 내용을 정확하게 판단해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올해 2월 법관 정기 인사로 양 전 대법원장 재판부는 전원 교체됐다. 재판부가 바뀌면 공판 절차를 갱신한다. 검사의 공소사실 진술, 피고인 변호인의 반박, 그리고 피고인인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로부터 2년 전인 2019년 5월29일. 첫 공판기일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 수사 결과를 “소설”, “사찰”, “포장”에 비유하며 그 수사 결과가 담긴 공소장을 “용두사미”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때와 입장은 다르지 않다. 법관 정기 인사로 인한 공판 절차 갱신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1심이 2년 넘도록 마무리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케 하는 풍경이다.

사법농단 재판이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지난 2년 동안 7개 중 2개 재판은 항소심까지 마치고 대법원에 올라갔다. 무죄 판단이 이어지다가,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1심 첫 유죄 판단을 받았다. 전선도 확대됐다. 헌정사상 최초의 판사 탄핵 심판은 물론, 인사 불이익 피해 판사의 민사 소송이 시작됐다. 하지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 그리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은 여전히 1심에 머물러 있다.

보통과 다른 그들의 재판

양 전 대법원장은 2019년 2월 구속 기소됐다. 양 전 대법원장은 같은 해 7월 보석으로 풀려나 지금까지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이 2년 넘게 진행되며 공판기일은 130회를 돌파했다.

2020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합의부에 배당된 형사 사건의 1심은 4건 중 3건(76.6%)이 6개월 안에 선고됐다. 2년 넘게 합의부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불구속 피고인은 2.1%(268명)에 불과하다. 물론 사건 내용이나 피고인 수에 따라 재판 기간은 천차만별이고 졸속이 우려되는 신속 재판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이나 임종헌 전 차장 사건 재판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국정농단 뇌물공여 사건으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1심 재판도 구속기간 만료일(6개월)인 2017년 8월27일보다 이틀 앞선 8월25일 마무리됐다.

재판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피고인도, 증인도, 재판부도 전·현직 판사인 전례 없는 재판인 만큼, ‘정석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 사법농단 재판이 ‘형사재판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이유다. 재판 기일 지정이나 증거조사 방식까지 주요 절차마다 격론이 오갔다. 두 장면을 떠올려보자.

장면1. 2019년 6월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서류 증거를 전수조사하기로 했다. 피고인 쪽에서 임종헌 전 차장의 유에스비(USB)에서 나온 법원행정처 문건이 중간 수정됐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결국 원본과 동일한지 일일이 대조하기로 한 것이다. 검찰이 법정 스크린에 컴퓨터 파일을 띄워 문건을 느린 속도로 넘기면, 변호인이나 재판부가 원본과 비교·대조하며 차이점을 찾아내는 식이다. 그렇게 발견하는 차이점이라고는 문서 글꼴이나 음영 표시 정도였다.

장면2. 4월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510호 법정.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증인석 아닌 법정에 달린 스피커에서. 1년 전인 2020년 4월10일 이 전 상임위원의 증인신문을 녹음한 파일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정지화면처럼 두 눈을 꼭 감고 미동 없이 앉아 있고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은 펜으로 밑줄을 그으며 소송 관련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그렇게 침묵 아닌 침묵 속에 오전 10시 시작된 재판은 오후 6시 마무리됐다.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은 4월9일부터 이 전 상임위원을 비롯해 주요 증인 4명의 증인신문 녹음파일을 법정에서 차례로 재생하고 있다. 재판장은 이전 재판부 공판기일에서 증거조사된 서류나 물건에 대해 다시 증거조사를 해야 하지만, 검사나 피고인이 동의하면 그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다(대법원 형사소송규칙 제144조). 증인신문 조서의 주요 내용을 고지하거나 이마저도 더 간소화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증인신문 녹음파일 재생이 ‘원칙’이라는 박병대 전 대법관 변호인의 지적에 재판부도 공감했다.

보통의 재판이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최용근 변호사(민변 사법센터 부소장)는 “헌법이 보장하는 피고인의 권한 행사로도 볼 수 있지만, 통상의 피고인이라면 절차를 잘 모르거나 알아도 사실상 그 권한을 행사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른 재판에서도 피고인의 권한 행사를 적극 수용할 것인가 법원이 답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증인신문 녹음파일 재생은 5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검사나 변호인이 다른 증인까지 추가 재생을 요구하면, 6월 초·중순까지 연장될 수 있다. 2021년 상반기는 공판 갱신 절차를 마무리짓고, 하반기에야 남아 있는 증인 20여명에 대한 신문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공정성 우려 해소’ 사실조회신청에
“재판장의 성찰 바라” 훈계까지
‘판사 독립이란 무엇인가’ 질문
사법농단 재판 2R 놓치지 말아야

“유죄심증 재판” 대 “양심대로 판단”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한발 더 나아간다. 재판장인 윤종섭 부장판사가 재판 시작도 전에 유죄 심증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2021년 2월 <조선일보>는 2017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법 법관들과 만난 자리에서 윤 부장판사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해 반드시 진상 규명하고 단죄해야 한다’고 말한 뒤 임 전 차장 재판부로 배치됐다고 보도했다. 임 전 차장은 이 보도를 참조해 면담 참석자나 발언 내용을 대법원과 법원행정처에 조회하겠다며 사실조회 신청을 냈다. 4월13일 임 전 차장 변호인의 법정 발언이다.

“그동안 대법원장이 보여준 태도에 비춰보면 이른바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자들에 대해 중형선고하라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의중이 이 사건 재판부 신설 및 구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여지가 충분합니다. 피고인으로서는 재판의 공정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정성에 대한 우려 해소 차원에서라도 이 부분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사표 반려를 둘러싼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짓 해명 논란, 6년째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 중인 윤종섭 부장판사의 근무 이력까지 연관 지은 의혹 제기다. 임 전 차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를 받아 특정 재판을 특정 방향으로 선고하게끔 유도했다는 혐의를 받는데 그와 비슷한 구조다. 재판부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재판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대한민국 헌법 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이 법대에 앉아 있는 제36형사부 구성원 모두가 대한민국 헌법 103조가 정한 법관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뿐입니다.”

전직 법원행정처 차장의 현직 판사 훈계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낸 사실조회 신청을 기각했다. 이에 대한 이의신청도 기각했다. 4월26일 재판에서 임 전 차장은 훈계하듯 재판부에 말했다.

“저 역시 30년간 법관으로서 봉직한 사람으로서 재판장님의 고뇌 어린 심경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중략) 만일 언론 보도와 같이 재판장님께서 그와 같은 발언을 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 재판에 임했다면 법관으로서의 직업적 양심보다는 개인적 양심을 우선시킨 것이 아닌가 피고인은 깊이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재판장님의 깊이 있는 숙고와 성찰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임 전 차장의 의혹 제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 6월 윤종섭 부장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을 제출한 바 있다. 윤종섭 부장판사가 사법농단을 엄단해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기자의 제보를 들었다는 게 이유였지만, 재판 지연 목적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기피신청을 내면 재판은 중단된다. 재판은 약 9개월여 만인 2020년 3월 재개됐다.

이번 사실조회 신청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고도 해석이 다양하다. 재판부는 지난 3월23일 직권남용의 새로운 법리해석을 바탕으로 이규진 전 위원과 이민걸 전 실장에게 첫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공범인 임 전 차장의 유죄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재판부 흠집내기로 사법농단에 대한 직권남용죄 첫 유죄 판결의 신뢰도를 낮추는 게 목적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2018년 시작된 임 전 차장의 재판은 현재 50%도 진행되지 못했고 윤종섭 부장판사는 내년에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 임 전 차장이 이 재판부에서 1심 선고를 받을 가능성은 낮다.

사법농단은 대법원장, 법원행정처장 등 직무감독권자가 사법행정(법원에 필요한 행정작용)을 명분으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사건이다. 유무죄 판단 과정에서 정당한 사법행정의 경계선이 그어져야 한다. 이는 반대로 이 경계선 안에서 보호돼야 할 재판의 독립, 판사의 독립은 무엇인가 질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사건의 본질을 잊지 않는 한편, 사법농단 재판이 남기고 간 형사 재판의 궤적들도 추적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법농단 재판 2라운드에 접어든 지금, 놓지 말아야 할 지점들이다.

고한솔 <한겨레21> 기자 sol@hani.co.kr

▶ 이른바 ‘사법농단 사태’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이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대법관 이상의 고위 법관들이 이렇게 무더기로 법정에 서는 것은 사법부 역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2019년 3월11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첫 재판을 시작으로, 진실을 밝히고 유무죄를 따지는 긴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법정 르포 방식으로 ‘사법농단 재판’을 중계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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