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고 쪼갠 원룸… ‘잠만 자는 방’에 내몰린 2030세대 [S 스토리]

정지혜 입력 2021. 5. 8. 13:55 수정 2023. 12. 1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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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 난민이 된 청년 1인가구
혼자 사는 가구 914만… 전체의 39.5%
20~30대 비중 2005년보다 20% 늘어
정치권 ‘표밭’ 불구 갈수록 열악해져
높아진 월세에 대부분 주거비 과부담
10명 중 3명 월 소득의 30% 이상 지출
그나마 5평 내외 공간… 환경도 열악
청년들 ‘경제적 부담 완화’ 가장 절실
전문가들 “1인가구 노인서 청년 이동
단기간 해소보다 장기대책 마련해야”
#1. 서울 용산구에 거주하는 대학생 김희진(가명)씨는 지난 2년 동안 5번 이사했다. 고시원에서 오피스텔, 원룸, 셰어하우스, 하숙을 전전했다. 그가 거의 5개월마다 한 번씩 집을 옮겨 다녀야 했던 이유는 월세 외에도 안전 때문이었다. 김씨는 “고시원에서는 지나치게 좁은 방과 보안 문제가 걸렸고 원룸에서는 사생활 침해, 택배상자에 적힌 휴대전화 번호가 유출될까 걱정됐다”며 “누군가와 같이 살면 덜 무섭기도 하고, 같은 월세로 훨씬 좋은 상태의 집에 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공동생활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2. 대학 시절부터 10년간 자취생활을 했다는 30대 직장인 이모씨는 해마다 주거환경이 악화하는 게 놀랍다. 이씨는 “월세 부담 때문에 반지하부터 옥탑방, 친구와 단칸방을 나눠쓰는 경험까지 모두 해봤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새로 생기는 신축 원룸을 보면 임대료는 비슷한데 방 면적이 예전에 비해 훨씬 좁다”며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청년을 위한 정책을 펴겠다고 하는데 딱히 무엇이 나아졌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권과 산업계가 20∼30대 1인가구를 주목하고 있다. 막 성인이 되어 독립을 시작한 20대와 경제력을 갖기 시작한 30대는 정치권엔 놓칠 수 없는 ‘부동층 표밭’이고 기업들엔 최근 들어 보편화한 1인가구 소비시장의 주력 고객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심에 비해 청년 1인가구의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가파르게 올라가는 주거비용과 줄어드는 1인당 거주면적, 안전에 대한 위협 등은 청년들 삶의 질은 물론 생존권과 직결된 경우가 많다.

◆‘5평 원룸, 방 쪼개기’…열악한 주거환경 여전

1인가구는 최근 몇년 새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주거형태가 됐다. 7일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통계에 따르면 4월 기준 전국적으로 혼자 사는 인구는 913만9287명이다. 전체 가구의 39.5%인데 역대 최고치다. 이 중 20대와 30대 초반 1인가구의 증가세가 도드라진다. 지난해 20∼30대 가구의 1인가구 비중은 2005년에 비해 20%나 증가했다.
청년 1인가구의 주거비 부담도 크게 늘었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청년 1인가구 10명 중 3명(31.4%)은 주거비로 월 소득 30% 이상 지출하는 ‘주거비 과부담’ 가구다. 일반가구(26.7%)는 물론 1인가구 전체 평균(30.8%)보다 높다. 지난 3월 기준 서울의 원룸 평균 월세는 51만원(‘다방’ 집계)이다.

주거 환경의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최근 1인가구를 겨냥한 주거시설은 연소득 1억원이 넘는 고소득자를 위한 ‘맞춤형 소형 최고급’ 시설이나 연소득 3000만원 이하 저소득층을 위한 ‘보급형 원룸’으로 나뉜다. 소형 최고급 시설은 월 임대료가 100만원이 훌쩍 넘는 반면 전용면적 16.5㎡(5평) 안팎의 보급형 원룸은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공급조차 부족해지는 실정이다.

대학가에는 방을 쪼개 여러 명을 입주시키는 불법개조 건축물이 난무한다. 서울 영등포구에서 8년째 자취 중인 서모(36)씨는 “4.5평 원룸에 살고 있는데 잠만 잔다는 생각으로 거주한다”며 “가장 힘든 건 누구를 데려오지 못할 정도로 공간 활용에 답이 없다는 점”이라고 토로했다. 서씨는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느라 짐을 최소화하려 노력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냥 쌓아두고 있다고 했다.

여성 1인가구의 주거 현실은 더욱 열악하다. 김희진씨는 “좀 더 안전하려고 하숙을 시작했지만 다른 층에 사는 남성이 침입한 적이 있다”며 “경찰로부터 그가 상습범이라는 말을 듣고 철렁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생 조모씨는 “여학생들이 사는 집에 외부인이 들어와 속옷 등을 훔쳐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 번 이런 일을 겪으면 다른 하숙집을 찾아야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조씨가 현재 거주하는 곳은 방 하나를 문 2개로 쪼갠 일종의 ‘공유형 자취방’이다. 방음이 안 되는 등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부모는 오히려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줄 수 있으니 더 안전하지 않으냐”고 반겼다고 조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취재진이 만난 청년들은 무엇보다 정부의 실질적인 주거비 지원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 여주시에서 4년째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박모(35)씨는 “가장 어려운 점은 전세 물량이 없다는 것과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라며 “나온 게 다 월세여서 경제적 부담이 크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고 토로했다. 박씨는 “직장 동기들도 모두 월세살이를 하고 있다”며 “정부가 월세를 보태주거나 전셋집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조모(26)씨는 “월세가 저렴한 자취방에 가면 안전이 우려스럽고, 보안이 잘 된 신축 오피스텔에 가려면 학생 신분으로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민정씨는 “보증금을 올리면 월세를 깎아주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보증금 지원이나 무이자 대출 정책을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양하고 품질 높은 주거상품 대폭 공급돼야”

물론 당국이 청년 주거지원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1인가구 특별대책 추진 태스크포스(TF)’는 기존 1인가구 지원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신규사업을 발굴해 1인가구가 원하는 지원대책을 내놓겠다는 방침이다. 강선섭 TF 단장은 “최근 관악구, 동작구 등 서울시내 원룸이 많은 곳부터 현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청년들 주거현실이 너무 비참하고 허탈했다”며 “1인가구들에게 실질적으로 와 닿는 정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다 나은 품질의 1인가구용 주택 공급을 늘리고, 청년층에 대한 사회보장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학)는 “1인가구 주거 비율은 계속 늘어나는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맞는 모델은 별로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 교수는 “최근 지어지는 신축 원룸 현장 등을 가 보면 옷장 하나 넣기 힘들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집들이 많다”며 “원룸 수요는 급증하는데 공급이 부족하니 아무렇게나 지어도 다 임대가 나가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대형 건설사들이 1인가구용 주택 건립을 꺼리는 것도 거주환경이 열악한 원룸의 난립을 초래했다. 한국의 건설업계는 1970∼80년대 4인가구용 85㎡ 아파트를 대거 공급하며 성장했다. 이들 건설사는 여전히 방 3칸짜리 아파트를 주력으로 짓는다. 그러다 보니 중소형 건설사들이 틈새시장 격으로 자격 미달의 원룸을 우후죽순 세우는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게 유 교수 설명이다.

유 교수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1인가구용 주택 공급을 꾸준히 늘리되 일정 수준의 품질이 보장되는 최소한의 규제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교수는 “당국이 단순히 공급을 늘리려고 규제만 풀어주면 지금처럼 질이 떨어지는 건물만 짓게 된다”며 “품질이 낮은 원룸이 자연스럽게 시장에서 외면받게 하려면 최소 10년 정도는 꾸준히 괜찮은 시설을 공급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에만 맡겨놓아선 변화를 기대하기 힘들다”며 “정부가 시장의 변화를 이끌도록 청년들이 주거시설 개선을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석재은 한림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사회보장의 패러다임 전환과 수혜 체계 개편 등을 제안했다. 석 교수는 “1인가구라고 했을 때 예전에는 노인가구에 주목했지만 이제는 청년 중심이 되고 있다”며 “사회 전체적으로 가족이라는 완충장치가 옅어지고 청년층의 개인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적 보호 장치를 청년 1인가구 중심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지혜·안승진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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