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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 한국의 '메디치가'로 거듭나나

김태훈 기자 입력 2021. 05. 09.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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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 2만3000여점이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 등에 기증된다. 윗줄 왼쪽부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 고려 불화 천수관음 보살도. 호안 미로의 ‘구성’,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아랫줄 왼쪽부터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이중섭의 ‘황소’,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연합뉴스


르네상스 시대 도시국가 피렌체를 쥐락펴락했던 메디치 가문에는 ‘책 사냥꾼’들이 있었다. 이 가문은 당대는 물론이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남은 예술작품들을 창작하도록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이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걸작들을 모으는 활동을 벌인 범위는 그림과 조각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넘어 고전 서적들에까지 미친 것이다. 책 사냥꾼들을 고용해 유럽 각지에서 사 모은 책을 소장하기 위해 건축한 도서관은 지금도 남아 있다. 피렌체에 있는 산마르코 수도원 도서관과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은 역시 메디치가에서 모은 당대의 걸작 예술작품과 함께 진귀한 필사본과 초창기 활자 인쇄본 고서들을 모아두고 후대인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1743년 사망하면서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가문이 소장한 모든 예술 자산을 피렌체에 기증하기도 했다. 융성했던 한 가문은 역사가 흐르면서 뒤안길로 사라져도 축적한 문화적 힘은 수백년이 지나고서도 유지되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예다.

선대 이병철 회장부터 양질의 컬렉션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남긴 ‘이건희 컬렉션’ 중 2만3000여점이 국립기관 등 공공 미술관으로 기증됐다. 규모는 물론이고 수집한 미술품 각각의 면모가 예상을 뛰어넘었기에 미술계뿐만 아니라 국민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기증 목록에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고려 유일의 ‘고려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를 비롯해 이중섭의 ‘황소’,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등 시대와 국경을 넘어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국보 14건과 보물 46건 등 지정문화재만 60건에 달하는 이번 ‘이건희 컬렉션’은 평범한 개인으로선 모으기 힘든 가치 있는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작가들의 면면만 봐도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등 한국 근·현대 대표 작가들과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블로 피카소 등 서양 유명 작가들이 포함돼 있다.

때문에 이 회장과 삼성가도 메디치 가문의 ‘책 사냥꾼’처럼 전방위적인 상시 수집에 나섰는지 궁금해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구체적인 실체가 밝혀지진 않았지만, 이 회장이 가진 막대한 영향력 덕분에 언제든 조언받을 수 있는 전문가 인맥을 쉽게 동원할 수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 미술계 인사는 “현대미술 작품만 놓고 보면 사실 돈만 있으면 사 모을 수 있지만, 좀더 앞선 시대의 작품이나 문화재까지 따질 때 돈만으로 살 수 없고 네트워크가 필요한 경우가 많아 이 회장만큼 전문적으로 수집한 경우는 국내에선 극히 드물다”고 말했다.

선대 이병철 회장부터 이어진 미술품 수집으로 이 회장이 예술품의 가치를 따지는 데 상당한 식견을 보였다는 점도 그가 바쁜 와중에도 양질의 컬렉션을 수집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한 갤러리 대표는 “이병철 회장 때부터 온갖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고미술품을 모은다는 소문은 파다했지만, 이 회장 대에 와서는 신인 작가 작품까지 살 정도로 구매 범위가 넓어졌으니 미술계로서는 가장 반기는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당초 이 회장 본인은 생전 자신이 예술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굵직한 대표작들은 직접 수집에 열성을 보였음을 내비친 바 있다. 1997년 출간된 유일한 에세이집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는 “상당한 양의 빛나는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고 이것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썼을 정도로 분산된 문화유산을 한곳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이 수백년 동안 모은 컬렉션을 한곳에 집중해 선보이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나, 영국 허트포드 후작 가문에서 5대에 걸쳐 수집한 ‘월러스 컬렉션’은 부를 축적한 가문이 당대의 문화예술 작품을 사회로 환원한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미국 멜론가의 앤드루 멜론은 워싱턴에 국립미술관 설립을 제안하며 건립 비용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까지 기부해 사실상 직접 국립미술관을 세울 정도였고, 그의 자녀들도 수집한 미술품을 기증하며 선친의 뜻을 이었다. 평범한 개인은 물론 국가 차원에서도 당장의 경제적 여력이 부족해 모으기 힘든 ‘컬렉션’이 이른바 ‘큰손’을 만나 더욱 가치를 높이게 된 사례들이다.

전국 지자체들 전시관 유치 뛰어들어

미술계에서는 이 회장 역시 생전의 문화예술계 지원이나 이번 기증으로 미친 문화적 파급력으로 따지면 ‘큰손’의 긍정적 영향을 보여주는 인물 명단에 충분히 들어간다고 입을 모은다. 이 회장이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프랑스 기메박물관,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등에 한국관 설치를 지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점도 높은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다만 이번 기증이 막대한 규모의 상속세를 피하기 위한 절세 전략이라거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을 위한 포석이라고 보는 시선도 없지는 않다. 이 가운데 절세를 위한 기증이라는 해석에 대해선 미술품에도 상속세가 부과되긴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 손익만 놓고 따지면 굳이 기증했을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많다.

액수와 건수 모두 엄청난 컬렉션을 일거에 판매하기는 힘들다 해도 기증보다는 판매를 통한 이익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이번 기증 목록에 포함되지 않고 삼성가에 남은 대표적인 작품인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을 비롯해 자코메티나 마크 로스코, 게르하르트 리히터 등 현대미술 컬렉션 중 일부는 삼성문화재단 등이 계속 관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장 유족 측은 기증한 예술품의 전시와 보관에 관해서는 별도의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기증된 예술품만으로도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선 기존의 수장 능력을 초과하게 되므로 컬렉션 작품이 새롭게 세워지는 별도의 전시관으로 향할 가능성은 높다. 전국 각지의 지자체가 앞다퉈 전시관 유치에 뛰어들 의사를 밝힐 정도다.

지자체 간 전시관 유치 경쟁이 과열되는 데 반해 미술계는 이미 국가로 귀속된 예술품의 공적 의무를 주장하며 근대미술관을 신설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아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에 반해 근대미술을 전문적으로 전시하는 공간은 전무해 미술사의 연속성을 파악할 수 없는 형편”이라며 “이번 컬렉션에 국내 근대미술 작품 1000여점이 포함돼 있어 전시에 충분한 작품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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