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표준을 주도하는 국가가 기술선도국이다

입력 2021. 05. 10. 00:35 수정 2021. 05. 10.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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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산업 여는데 표준이 큰 기여
포드 대량생산, 부품 표준이 핵심
생산 효율 넘어 혁신 속도도 높여
표준 위한 핵심기술 많이 가져야


총성 없는 전쟁, 표준경쟁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지난해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전시회(CES) 기간에 사물인터넷의 표준과 관련한 행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찬 그 방에서는 가전제품 중심의 사물인터넷 표준기술이 시연되었다. A 회사의 TV 화면에서 B 회사의 에어컨을 작동시키는 등 새로운 기술적 가능성을 보고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술이 사실상의 표준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의 가전회사가 수백개 글로벌 회사들로 구성된 연합팀을 이끌면서 수년간 국제적인 표준 정립 과정을 주도해왔다는 점이었다.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기술환경은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 온 크고 작은 표준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휴대폰 하나를 뜯어 보더라도 통신 관련 표준뿐 아니라 배터리, 디스플레이, 메모리칩 등 중요한 부품에서부터 쌀알보다 작은 볼트, 너트에 이르기까지 크기와 성능, 작동원리를 규정하는 각종 표준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표준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만큼 길지만, 특히 근대 산업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대 산업의 출발을 알린 포드자동차의 대량생산 시스템도 부품이 표준화되지 않았다면 실현될 수 없었다. 표준화는 생산의 효율성뿐 아니라 혁신의 속도도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표준화된 것까지는 다시 고민할 필요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새로운 것에만 노력을 집중하면 되기 때문이다. 첨단 로봇을 개발하면서 나사못의 각도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신경 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혁신적 기술을 정의하는 새로운 표준은 탁월한 천재가 일필휘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모두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먼저 검증한다. 검증 결과 애초의 제안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면 또 누군가 수정해 제안하고, 검증과 합의, 공유의 과정을 오랫동안 거치면서 집단지성으로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이다. 도전적인 시행착오를 축적해가며 새로운 개념설계를 만들어가는 바로 그 과정이다. 이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기술선도 집단이 속한 국가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표준경쟁을 국가 간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까지 부른다.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소비자가전전시회(CES) 2020’에서 인간 중심 미래 모빌리티 비전 이미지를 공개했다. [사진 현대차]

표준은 기술과 제품, 서비스의 합의된 규격으로서 개념설계의 압축판이자 게임의 룰과 같다. 기술 선도국과 추격국의 차이는 표준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기술 선도국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에 기반하여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는 국가이고, 추격국은 그 표준을 받아들여 성실히 실행하는 국가다.

표준을 주도하는 선도 기업과 국가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한 차원 높은 게임을 한다. 신기술을 개발했더라도 시장을 지배하면서 사실상의 시장 표준을 강제해 나갈지, 국제적인 협의체를 통해 공식표준을 먼저 만들어갈지 선택한다. 누구와 손을 잡을지, 가치사슬에서 누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까지 고려해 표준화의 범위와 속도도 결정한다. 표준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특허를 ‘표준특허’라고 하는데, 표준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나면 기술 선도국은 이 표준특허를 기반으로 로열티까지 거두어들인다.

추격국들은 표준이 정해지고 나면, 표준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 싸고 더 튼튼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가치사슬에 참여한다. 시장이 포화하고, 추격국들이 너무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단계가 되면, 기술 선도국들은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면서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안타깝지만, 추격국은 다시 바뀐 규칙을 열심히 익히고 따라가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표준을 누가 선도하고 있는지를 보면 기술 선도국과 추격국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2017년 9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국제통신연합(ITU) 텔레콤 월드 2017. 5G가 최대 화두였다. [중앙포토]

중국의 기술 수준을 평가하는 다양한 시각들이 있지만, 국제표준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단계로 진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대표적으로 5G 이동통신 기술의 표준에서도 거대한 중국시장의 이점을 활용하여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실증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면서 자국의 기술을 표준특허로 만들고자 기를 쓰고 있다. 5G 표준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은 자율차, 스마트팩토리, 스마트시티 등 미래세계를 규정하는 첨단분야의 가치사슬을 지배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5G 기술을 핵심 타깃으로 중국을 봉쇄하려는 것도 미래 패러다임의 주도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중국몽의 다른 표현은 바로 이런 세계적 표준을 선도하는 것이다. 일대일로와 연계한 세계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스마트시티 기술의 경우에도 이미 전 세계 100여개 도시와 협력관계를 맺고 교통, 행정, 미디어 서비스 등 각 분야에서 ‘차이나 스탠다드’가 스며들게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항공기, 의약, 인공지능, 양자통신, 클라우드 등 미래 첨단분야의 규칙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중국표준 2035’ 계획도 준비하고 있다. 표준을 수용하면서 더 싸게 잘 만드는 단계를 넘어 개념설계를 주도하는 중국으로 탈바꿈할 때가 되었다는 태세전환이 확연하다.

한국은 해외의 표준을 번역해서 도입하는 것으로 산업발전을 시작했다. 90년대를 넘어서면서 조금씩 도전에 나섰는데, CDMA 기술의 최초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국제적 표준 설정 과정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 실패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 무선광대역 이동통신의 세계표준으로 와이브로(WiBro) 기술을 제안하였으나 생태계 조성이 지연되는 가운데 4G 기술이 급작스럽게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묻히기도 했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국제표준 무대에서 활동을 넓혀왔고, 이제는 이동통신,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5G의 경우 미국과 유럽특허를 기준으로 한국 기업들이 핵심적인 표준특허의 25.4%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대표기업 8개사의 합계나 미국 상위 5개사의 합계가 각각 19%를 조금 넘는 수준임을 고려하면 지금까지는 한국이 5G 표준을 선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날 와이브로에서의 실패 경험이 결정적인 자산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국가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3대 국제표준기구에서 인정하는 표준특허 숫자를 기준으로 할 때, 어느덧 세계 5위 수준에 이르렀다. 지난 3월에는 6G 기술에 대해 최초의 밑그림을 그리는 비전워킹그룹 위원장으로 한국기업의 전문가가 선출되기도 했다.

벌써 만족할 때가 아니라 이제부터 신발끈을 조일 때다. 무엇보다 표준선도국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알박기가 가능한 표준특허, 즉 핵심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개념설계를 지향하는 도전적 연구를 더 진작해야 하는 이유다. 핵심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기업, 대학, 연구소 등 관계자들의 역량을 모아 국가적 표준전략의 모범을 만들어내는 선도 프로젝트도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첨단 측정 장비나 인증 관련 설비를 만드는 역량과 인력도 시급하게 키워나가야 한다.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을 빨리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대학과 연구소의 장비와 인력을 산업 공동의 혁신 인프라로 활용하는 일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테스트베드 코리아’를 목표로 우리 산업 곳곳에서 많은 실험이 일어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지원하고, 이를 위해 신기술과 관련된 각종 규제를 혁신해야 한다.

외교정책도 빠질 수 없다. 승자-패자의 사고방식으로는 국제표준을 선도할 수 없다. 인류 공동의 발전을 지향하면서 우군을 만들어가는 한 차원 높은 국제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정상외교의 아젠다로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개념설계를 주도하는 기술 선도국의 눈높이에 서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표준역량이 그중 하나다.

■ 국제기구 진출로 ‘표준굴기’ 뒷받침하는 중국

「 국제표준을 관장하는 주요 3대 기구는 국제통신연합(ITU),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그리고 국제표준화기구(ISO)다. 5G 이동통신의 공식표준을 주도하는 ITU의 사무총장은 중국인 자오허우린이다. 1986년 ITU의 초급엔지니어로 출발하여 중국의 총력지원하에 2014년 마침내 사무총장에 올랐다. IEC의 총재는 2020년부터 중국의 국영 전력망공사 회장이었고, 현재 최대 국영 발전회사의 회장인 슈윈비아오가 맡고 있다. 2015년에는 3년 임기로 산업 전반을 포괄하는 ISO의 의장을 국영 철강회사 회장과 중국강철공업협회 회장을 역임한 장샤오강이 맡기도 했다. ISO는 2008년 정관을 개정하여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에 이어 중국을 6번째 상임이사국으로 지정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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