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EYE] 걸리면 죽는다, '금기'에 휘둘리는 무관용 사회

고철종(논설위원) 기자 입력 2021. 5. 10. 14:42 수정 2021. 5. 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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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덕목이 공감과 균형 감각이라는데 현실은?


우리 사회에는 완충지대, 비무장지대가 없다. 내 편이 아니거나 내 기준에 안 맞으면 바로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을 벌인다. 잘못 걸리면 죽는 사회, 승자는 독식하고 패자는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사회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극단적 잣대는 성과 이념, 계층과 지역 등의 겉옷을 입은 채 제 기준에 맞지 않는 상대를 단칼에 동강 내려고 눈을 부라리고 있다. 이 잣대에 걸리면 오금을 저리고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겁나서 응시생들에게 편하게 질문할 수가 없어요."

유수의 대기업에서 인사를 담당하는 임원을 만났더니 이렇게 말한다. 신입사원 채용 때 면접은 가장 중요한 절차다. 하지만 좋은 사람 가려낼 욕심으로 이것저것 묻다 보니, 가뜩이나 온갖 박탈감으로 화가 나 있는 청년층 응시자로부터 갑질이나 성차별, 이념 검증, 학벌 중시 등의 논란에 휘말린다는 거다.

그의 말은 사실이다. 구직 사이트인 '사람인'이 200여 개 기업을 조사했더니, 80%의 면접관들이 이런 논란에 휘말릴까 봐 걱정하면서 자기검열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물론 그동안 과한 측면이 있었기에 바뀔 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서로에 대해 너무 예민하다 보니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피로감이 급증한다.

판매나 마케팅 쪽은 더 걱정이다. 도대체 어디서 영문 모를 악재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성차별, 여혐, 남혐, 일베, 친일, 친중, 위안부, 5.18, 민주화, 운동권, 노조, 비정규직, 촛불, 재벌, 역사 등에 관련된 온갖 형태의 극단적 기준이 칼날을 퍼렇게 벼린 채 금기의 영역을 만들어 희생양을 기다리고 있다. 기업만 두려울까. 공공기관이나 문화단체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개인들도 그렇다.
 

포용성이 결여된 사회

이는 사회적 포용성의 결핍에 따른 결과이다. 타인 혹은 다른 집단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포용성이 약한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이 각자의 예리한 기준을 긋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 속에 사는 그런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강제적 혹은 자율적 규범이 과잉으로 치닫는다. 온갖 세밀한 규제와 기준이 새로 생기고, 면도칼 같은 잣대로 누가 걸리나 기다린다. 시범 케이스로 걸리면 끝이다.

과잉 규범이 만드는 급속한 변화는 생활 속에서도 많은 불편을 초래한다. 가까운 예로 성차별을 의식해 남녀 화장실 표시에 색깔과 바지, 치마 등의 구분을 없앤 곳에선, 남자가 여자화장실에, 여자가 남자화장실에 들어갔다 기겁하는 해프닝이 수시로 벌어진다.

성차별 논란에 젊은 남녀가 대립적 관계를 형성하고, 행여 갑질 파장이 일까봐 직장에서 회식이 사라지며, 하청업체나 파견사원에 대한 업무 협의가 두려워진다. 제품 홍보에서도 만에 하나 영문도 모른 채 금기에 휘말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적개심을 가진 온갖 편들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정치인들이 편승해 과잉 입법에 나서다 보니, 운전하는 것, 집 짓는 것, 가게 운영하는 것, 아르바이트생 쓰는 것, 야근하는 것, 전세 구하는 것, 집 팔고 사는 것 등 온갖 기본적 생활들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좋은 변화의 길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수용자가 감당할 수 있을 폭과 속도로 진행돼야 한다. 오랜 규범과 관행을 급속히 바꾸려 하면 큰 불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남녀 차별을 없앤다고 북유럽처럼 남녀 화장실을 구분 없이 함께 쓰게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금기에 다칠까 봐 자기검열이 필수인 사회

모두가 각자의 금기를 만들어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에서는 표현의 주체들이 자기검열을 한다. 당연히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인 표현의 자유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런 금기를 국가권력이 만들 때는 더욱 심해진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렇다.

정치는 서로 다른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의 갈등을 조화롭게 풀어내는 게 주된 임무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반대로 편 가르기와 거기서 생긴 갈등을 에너지로 세력을 키워왔다.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금기를 만들고 예리한 잣대로 보상과 응징을 해온 국가권력의 행태에서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학습하고 자신만의 금기를 만든다.

모두가 서로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회에서 통합과 시너지를 기대할 수는 없다. 주요 사안에 대한 언급을 피하고, 인간관계를 멀리하며,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오전에 방송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에서 대통령의 덕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균형 감각과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공감 능력이라는 취지로 답변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많은 영역에서 균형이 깨지고 공감보다는 적대감이 우선하고 있다.

현재의 시대정신은 뭘까. 온갖 영역에서 심화된 분열과 갈등을 끝내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관용이 없는 무자비한 정글이 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통합의 리더십은 아직도 기대하기 힘든 요원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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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종(논설위원) 기자sbskcj@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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